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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DE : 세이지 - @seisayji

레몬 레플리카 레볼루션

Trigger Warning: 유혈, 상해

 

해가 졌다.

붉은 원이 지평선 너머로 모습을 감췄다. 잔상과도 같던 밝음이 사라지자, 세상이 순식간에 칠흑으로 물들었다. 빛이 없는 도시는 어둡다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만큼 검었다. 어떠한 것도 보이지 않고, 어떠한 것도 들리지 않고, 어떠한 것도 느낄 수 없는 세계. 사람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죽어버린 흑백의 세계. 퓨즈가 끊긴 도시 한 가운데에서 하나의 소리가 울려 퍼졌다.

 

째깍, 째깍, 째깍.

 

규칙적인 소리가 도시 전체를 메웠다. 그것은 시계의 초침 같기도, 컴퓨터의 재부팅 시간을 가리키는 타이머의 소리 같기도, 혹은 세계가 일어나는 조짐 같기도 했다.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도시의 그림자 속에서 누군가가 생각했다. 셋 중 하나이거나 혹은 셋 전부이거나, 어느 쪽을 고르든 정답이다. 지금부터 도시는 시작될 것이다. 

 

째깍, 째깍.

째깍.

 

하나의 소리가 멈췄다. 적막이 깔린 도시의 정중앙, 가장 높게 솟아 있던 검은 형체가 가볍게 진동했다. 달칵. 무언가 맞춰지는 소리가 울렸다. 잘 다듬어져 세련된 초고층 빌딩의 꼭대기에 불이 들어왔다. 형광기가 도는 파란 불빛이 쨍하게 도시 전체를 비췄다. 빌딩의 꼭대기에는 거대한 시계가 달려 있었다. 서늘한 기운이 푸른빛과 함께 시계판 위로 감돌았다. 죽어버린 도시를 상징하듯이, 시곗바늘은 정확하게 자정을 가리킨 채로 멈춰 있었다. 도시 전체를 메우던 시계 초침 소리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림자 속 누군가가 자켓 소매를 걷어 올렸다. 미약한 푸른빛이 가닿은 소매에는 작은 손목시계가 채워져 있었다. 건물의 시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정교한 톱니바퀴들이 시곗바늘과 함께 끊임없이 움직였다. 빠르게 맞물리고 채워지길 반복하다, 멈췄다. 그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시작의 징조였다. 

 

째깍.

 

건물의 초침이 움직였다. 달칵, 달칵, 달칵. 무언가의 준비가 끝나기라도 한 것처럼 원래의 속도를 찾아 빠르게 회전했다. 한 바퀴가 돌아갔을 때 분침이 움직였고, 그와 동시에 시침이 느리게 본인의 자리를 벗어났다. 시간이 도시를 장악하자 도시 또한 시간에 부응하듯 진동했다. 건물의 꼭대기에만 맴돌던 푸른빛이 아래로 흘러내렸다. 건물 전체가 쨍하게 빛을 발하자 파도처럼 푸른빛이 도시 전체로 퍼져 나갔다. 가동되기 시작한 도시에서 기이한 활력이 감돌았다.

그림자가 서서히 거둬지자 그 안에 감춰져 있던 누군가도 함께 세상에 드러났다. 가죽 자켓 특유의 질감이 빛을 반사해 광택을 비췄다. 채도 다른 푸른 색 엑스자 모양 핀이 반짝였다. 칠흑 같던 어둠을 닮은 머리카락이 바람을 타고 살랑였다. 드러난 흰 손목에서 손목시계가 빛을 발했다. 빠르게 돌아가는 초침들 위로 불투명한 막이 덧씌워지더니 순식간에 홀로그램 창이 생겨났다. 

 

[도시 가동 11:59:59]

[임무를 수행하세요.] 

 

홀로그램 창들이 순식간에 번식하듯 늘어났다. 수많은 감시 드론들 하에 비춰지는 도시 곳곳의 모습들이 담긴 창이 하나, 도시의 실시간 정신 수치를 도표화 시킨 창이 하나, 그의 팀에 소속된 팀원들의 프로필과 현재 수치가 담긴 창들이 총 네 개. 그 중에는 그 자신에 대한 창도 포함되어 있었다. 흑발에 선명한 백안을 지닌 남성이 뚱한 표정을 지은 채로 찍은 사진이 한 장, 그 옆 최상단에 적혀 있는 건 [C0DE NAME: DEMON]. 그가 익숙하게 홀로그램 창들을 훑고선 귀에 끼워진 이어셋에 대고 읊조렸다.

 

"도시가 가동됐습니다."

 

홀로그램 창들이 속속들이 지워졌다. 팀원들이 이어셋을 끼우고 준비를 마쳤다는 일종의 신호였다. 데몬이 숨을 골랐다.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그의 흰 눈동자 안에 도시의 푸른빛이 아른거렸다. 

 

"팀 레볼루션 하트. 임무 시작합니다."

 

 

 

 

2376년, 세계는 급속도로 발전했다. 세상이 눈에 띄게 바뀌었고 어릴 적 많은 사람들이 꿈꿨던 대부분의 공상과학 소재들이 현실화 되었다. 대중화 된 홀로그램 ai를 통해 삶을 관리 받기 시작했고, 완벽하게 짜여진 생체리듬에 맞춰 살아가게 되면서 한계 수명이 180살에 도달했다. 눈부시게 발달한 기술 속에서 많은 사람들은 인류가 이룩해낸 과학에 찬사를 보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시간에 따른 지구의 오염을 걱정하는 목소리를 냈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필연적으로 지구의 자연은 훼손되기 마련이고, 이미 복구할 수 있는 선을 넘어섰기 때문에 방법 또한 없을 것이라며 인류의 멸망을 예측하는 사람 또한 있었다. 실제로 어느 정도 사실을 바탕으로 한 예측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지구를 버리고 다른 행성으로 이주한다든가, 혹은 바다나 지하 같은 공간을 발굴해내자는 방법들을 제시했다. 그러나 불가능했다. 인간이 기원 후 20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오로지 지구의 지상에서만 살았던 이유는 단순히 기술의 부족이 아닌, 그곳이 인간에게 최적화 된 자연환경이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시뮬레이터들이 인류가 다른 곳으로 이주할 경우 평균 수명이 138살 정도 단축된 42살 정도에 그칠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미 늘어난 수명을 맛본 인류는 격렬하게 저항했다. 현재 살고 있는 우리의 거주지를 버리고 싶지 않다는 의지가 하늘을 뚫을 즈음에, 과학자들이 기어코 한계를 극복했다. 신도시의 등장이었다.

과학자들이 내놓은 방법은 다음과 같았다. 일명 신도시라고 부르는, 하루 24시간 중 12시간만 가동되는 도시를 구축할 것. 그렇게 하면 지구가 자가 회복을 거치는 시간을 충분히 가질 수 있으니 지구의 수명을 연장시킬 수 있으며, 우리가 살고 있는 지상을 버리지 않아도 된다는 결론이었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떻게 하는가. 도시가 가동되는 12시간 동안은 자유롭게 살아가되, 도시의 가동 시간에 맞춰 12시간이 지나면 죽은 듯이 잠들어야 했다. 기이했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상에서 살 수 있다는 그 자체에 환호했다. 그렇기에 12시간이 지나면 자동으로 생체 리듬을 조절해 수면에 빠지도록 만드는 생체칩을 이식받는 것에 찬성했고, 99.9%의 국민이 생체칩 이식술을 받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러한 시스템이 운영 가능한 데에는 조건이 있었다. 완전한 신뢰를 바탕으로 국민들의 안전이 절대적으로 보장받을 것. 

그렇기에 등장한 게 특수경찰이다. 특수경찰은 예외적으로 생체칩을 이식받지 않으며, 시스템의 관리자 권한을 부여받기 때문에 12시간이 지나더라도 잠에 들지 않는다. 특수경찰의 모든 행동은 절대적으로 국민의 안전을 위해 행해져야 하며, 이를 위해 모든 무기류들이 압수 및 사용 금지된 현 사회에서 유일하게 보급용 시스템을 사용할 수 있다. 보급용 시스템이란, 이름 그대로 시스템을 적용하는 각종 도구이다. 구도시에서 사용하던 무기의 형태를 닮았으나 엄연히 다른 종류였다. 대상자를 등록하면 시스템이 대상의 생체칩을 인식하고, 사건의 경중에 따라 무기를 활용한 대상의 제압을 허가했다. 시스템에 의해 움직이는 도구이라는 의미로 국가는 해당 기기를 시스테믹(systemic)이라고 명명하고, 무기가 아닌 국가 치안 유지용 안전장치라고 설명했다. 대중이 이를 어떻게 받아들였든 결과적으로는 성공적이었다. 범죄율이 급격하게 하락했고 사람들은 시스템을 맹목적으로 신뢰하며 12시간이 끝나는 즉시 잠에 드는 신도시의 생활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신도시를 믿을 수 있도록 하는 특수경찰은 보안 상 정체가 숨겨져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동경이자 선망의 대상이 됐다. 그들은 단순히 경찰을 넘어서 일종의 영웅으로 받아 들여졌고, 실제로 어린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동화책에서는 영웅을 특수경찰로 그려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따금 등장하는 목숨을 구원받은 사람들의 생생한 증언이라든가, 갈수록 하락하는 범죄율과 검거율 100퍼센트를 자랑하는 도시의 치안 통계가 발표되면 대중은 한층 더 열렬하게 환호했다. 우리를 지켜주는 특수경찰들에게 감사를 표하며, 그들을 한 번 쯤 만나보고 싶다는 인터뷰도 수두룩하게 뽑혔다. 지금 건물 위로 지나가는 홀로그램 창에서도 한 명의 학생이 발그레한 표정으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특수경찰 분들을 만나면 꼭 싸인을 받고 싶어요! 분명 멋있고 대단한 분들이실 거예요!

 

"개뿔."

 

잭이 고개를 돌렸다. 특수경찰, 특수경찰. 매일같이 저렇게 떠들어대고 있으니 갈수록 이 망할 신도시에서 모습을 숨기기가 더 어려워지고 있는 거다. 그렇게 국가에 대고 민원을 때렸는데도 대중이 이만큼 호의적으로 반응하는 대상도 없으니 홍보용으로 잘 써먹고 있는 것 같았다. 현직 특수경찰 소속 1팀, 통칭 레볼루션 하트의 팀장을 맡고 있는 코드네임 데몬이 한숨을 쉬었다. 멋있고 대단한 분들일 거라던 학생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렸다. 차라리 멋있고 대단했으면 좋겠다. 

 

─형! 현장 아무리 뒤져도 나오는 게 좆도 없는데 그냥 집 가면 안 돼요?

"되겠냐? 클라운은 이 새끼 단속 안 하고 어디로 튀었어."

─그 형은 저기서 타코야끼 사먹고 있는데요.

"다음 달 그 놈 월급 그대로 팀 회식비에 쓰기 전에 일하라고 전해라."

─전 고기가 좋아요.

"메뉴 고민하지 말고 똑바로 찾기나 하라고."

 

이딴 놈들 데리고 일하는 것도 힘들어 죽겠으니까. 팀원들의 능력치와는 별개로 다루는 게 극악의 난이도였다. 방금까지 잭과 대화를 나눈 사람은 코드네임 파라곤, 본명 아카이로 류. 팀 레볼루션 하트의 막내이자 타격을 담당했다. 시스테믹과의 원활한 동조와 천부적인 타격 실력이 합쳐져 지난 시험 수석으로 들어온 인재 중에 인재인데 흥미가 없으면 자꾸 다른 데로 샜다. 인력이 부족해서 이번에 클라운과 함께 수색 팀으로 넣은 게 화근이었다. 지루해하는 게 눈에 뻔히 보이니 좀 붙잡으라고 클라운을 붙여놓은 것도 있었는데 이 미친놈은 그냥 타코야끼 사먹으러 갔다 이거지. 이어셋 너머로 누군가 황급히 달려오는 듯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파라곤이 본인 말을 곧이곧대로 클라운에게 전한 건가 싶다. 데몬이 이어셋을 한 번 가볍게 두드렸다. 무전 연결이 클라운에게로 넘어갔다.

 

─데몬 때문에 입천장 다 데일 뻔 했잖아요. 형이 책임질 것도 아니면서 완전 너무하네.

"너 제대로 일 안 하면 다음 달 월급 나오자마자 카드 뺏어서 회식비로 긁어버릴 거다."

─헐.

"오늘 안으로 실마리 잡아야 돼. 똑바로 찾아라.

─이렇게 내 노력을 몰라준다니까. 저 조사 거의 다 끝냈어요, 지금은 기다리는 중.

"뭐라도 나오면 연락 해."

─넹.

 

코드네임 클라운, 본명 제미니. 팀 레볼루션 하트에서 수색을 맡고 있다. 센스가 좋고 신체 감각이 뛰어나 현장에 던져놓으면 일단 뭐라도 찾아오는 걔, 정도로 특수경찰 사이에선 유명했다. 그런 놈이 정작 일하라고 던져놓으면 자꾸 속을 뒤집어놓는다는 것도 좀 유명해졌으면 좋겠는데 그런 건 알려지질 않는 게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객관적으로 일처리 능력이 뛰어난 건 맞았으니 입만 좀 다물면 좋은데 그럴 생각은 안타깝게도 없어 보였다. 아무튼 조사는 다 끝냈다니 다행이었다. 이제 뭐라도 나오기면 하면 되는데. 잭이 습관적으로 본인의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잭의 홍채가 닿자 자동으로 홀로그램 창이 떠올랐다.

 

[도시 가동 06:44:04]

 

6시간 정도 남았나. 도시가 멈춘 다음에 움직일 수 있다고 해도 여러 귀찮은 제약들이 따랐고, 무엇보다 대상을 찾아내 생체칩을 등록하는 건 가동된 시간 동안만 할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가급적 이 시간 안에 모든 걸 찾아내야 했다. 잭이 본인의 머리를 헝클이듯 쓸어 넘기며 이어셋을 두 번 두드렸다. 무전 연결이 마지막 남은 레볼루션 하트의 팀원이자 사령관에게로 넘어갔다. 

 

─타이밍이 좋네. 막 파라곤한테서 자료가 도착했거든.

"헤드쿼터, 어떻게 생각해."

─생각보다 더 철저해. 우리가 쫓을 거라는 걸 예측해서 상당히 많은 준비를 해둔 것 같아. 감시 드론에 딱 한 번 잡히긴 했는데 그마저도 사각지대에 걸쳤어. 일단 이건 너한테도 보내둘게. 

"오케이. 빡세네. 일단 그쪽으로 갈게."

─그래. 애들한테는 내가 복귀하라고 말해둘게.

"걔들 도착하면 한 대 좀 때려줘."

─그런 건 데몬이 나보다 더 잘하면서. 아무튼 빨리 와.

 

헤드쿼터가 무전을 돌렸다. 데몬이 귓전을 두드려 완전히 무전을 끊어두고선 마른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팀 레볼루션 하트의 마지막 팀원이자 맏형이고, 사령관을 맡고 있는 코드네임 헤드쿼터. 본명은 오뉴. 대체로 조사 및 대상자 심문과 팀 전체의 행동 강령 지시를 맡고 있었다. 잭이 데몬이라는 이름을 받기 전부터 다른 팀에서 국가 경찰로 활약 중인 사람이었는데, 냉철한 판단력과 이성으로 그는 모든 걸 꿰뚫어본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였다. 레볼루션 하트에 들어왔을 때부터 꾸준하게 사건 해결에 높은 공헌을 하고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 헤드쿼터가 본인 입으로 대상자가 철저하다고 말했다는 건 이 사건이 상상 이상으로 까다롭다는 걸 의미했다. 세상에 힘든 사건이 어디 있겠냐만은. 잭이 작게 한숨을 내쉬면서 오뉴의 사무실로 걸음을 옮겼다.

 

 

 

 

[임시저장] [단독] "신도시에서 일어나는 연쇄 살인, 범인은 오리무중··· 특수경찰도 손 쓰지 못 하나" 

"이게 뭐게."

 

오뉴가 모두의 앞에 홀로그램 창을 띄웠다. 인터넷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기사 제목이었다. 문제가 있다면 오뉴가 직후에 함께 띄운 창이다. 신도시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한 번쯤 이름을 들어봤을 법한 언론사 마크가 홀로그램 창 한가운데에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잭과 제미니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검거율 100퍼센트, 완벽한 치안을 자랑하는 국가에서 이런 기사를 가만히 둘 리가 없었다. 애초에 연쇄 살인 건도 신도시의 시민들이 불안해 할 것을 염려해 아예 언론을 통제하고 관련된 기사를 내보내지 못하게 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 기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론 측에서 냄새를 맡고 특수경찰의 행보에 따라붙었다는 일종의 신호탄이었다. 이럴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빨리 꼬리를 잡힐 줄도 몰랐다. 류가 창으로부터 시선을 피하는 사이, 오뉴가 셋의 얼굴을 돌아보고선 말을 이었다.

 

"오늘 아침에 나갈 뻔한 속보 기사. 다행히 미리 알고서 막았지만 이게 시작이란 걸 다들 알 거라고 생각해."

"······."

"대상자가 저지른 살인은 총 3건, 이 연쇄 살인의 대상자를 찾지 못한 건 벌써 10일째야. 위에서 아무리 덮어준다고 해도 한계가 있어. 그러니 언론사가 기어코 따라붙은 거지."

"······."

"얘들아, 조금만 더 힘내자."

 

네에. 평소보다 힘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오뉴가 쓰게 웃었다. 사실 팀 레볼루션 하트의 노고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건 사령관인 오뉴였다. 10일간 대상자를 잡지 못했다고 해서 10일간 그들이 놀고먹었다는 이야기가 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적어도 1팀이 만들어지고 나서는 이렇게까지 장기전으로 이어진 사건이 없었다. 그렇기에 모두가 더 신경을 곤두세우고 이 연쇄살인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12시간이 지나도 잠들지 않는다는 건 12시간의 휴식을 보장받지 못한다는 걸 의미했고, 도시가 잠들었을 때도 그들은 오뉴의 비밀 사무실에 모여 머리를 싸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별다른 소득이 없었던 것이다. 되도록 고생했다고 말해주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는 현실이 씁쓸했다.

헤드쿼터가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결 가라앉은 분위기가 마음에 쓰였다. 이번 사건만 제대로 끝내면 뭐라도 사먹여야겠어. 생각해보니 다 같이 제대로 밥을 먹은 지도 꽤 됐다. 오뉴가 흐름을 갈무리하고 다시 한 번 현장으로 나가보는 게 좋겠다는 상투적인 말을 하려던 참에, 제미니가 상황을 둘러보다 자연스럽게 말을 꺼냈다.

 

"근데 헤드쿼터. 저 보고할 게 하나 있어요."

"우리끼리 있을 땐 본명으로 불러도 된다고 했잖아. 뭔데?"

"넹. 그럼 오뉴 형. 찾아낸 게 하나 있는데 이게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거든요. 그래도 일단 보여드릴게요."

 

제미니가 허공을 몇 번 두드리자 커다란 홀로그램 창 하나가 넷 앞에 나타났다. 오늘 도시가 가동된 직후에 발견된 사건 현장이었다. 이미 감시용 드론을 통해 모두가 공유한 광경이었고 특별히 달라진 점은 없었다. 과연 무엇을 발견했다는 건지 한 사람을 제외한 모두가 숨죽여 기다리고 있을 때, 제미니가 모서리에 있는 벽을 확대했다. 아주 옅지만 무언가에 쓸린 자국이 있었다. 자국을 인식한 시스템이 자동으로 분석을 시작했다. 익숙한 로딩 화면이 수 초간 지나가고 완료 창이 떴다. 천에 쓸린 자국으로 예상, 약 4-6시간 전에 생긴 것으로 추정. 그들이 사건 현장을 발견한 시각과 일치했다. 

 

"사실 이 정도 자국은 흔히 생길 수 있는 거고 특별히 무슨 증거가 되진 않는데요, 제가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저 자국을 발견했거든요. 특이한 점이 하나 있었어요."

 

제미니의 말이 맞았다. 저 정도 자국으로는 어떠한 단서도 되지 않는다. 천에 쓸린 자국이라 해도 어떤 소재의 천인지 특정할 수 없는 이상 대상자를 찾기란 불가능했다. 그러나 오뉴는 알고 있었다. 제미니가 증거라고 가져왔을 정도면 단순히 여기에서 그치진 않을 것이다. 일에 있어서만큼은 확실하고 깔끔한 걸 좋아하는 제미니였으니 그랬다. 그리고 오뉴의 대상을 적중하듯 그가 본인의 콧잔등을 두드렸다. 코?

 

"저 자국 근처에서 레몬 향기가 났어요."

"레몬?"

"확실해요. 지금은 다 지워졌겠지만 분명 레몬 향이었어요. 그런데 향수 냄새라고 하기에도 좀 묘했는데. 정말 생 레몬 향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느낌."

 

레몬, 레몬이라. 단언컨대 범죄 현장에서 흔하게 날 법한 향은 아니었다. 대상자의 옷이 쓸린 자국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난 향이라면 옷에 배어있던 향이 벽을 스치며 묻어났을 것이다. 레몬이 섞인 시트러스 계열의 향수일 가능성이 제일 높은데, 제미니가 이미 향수는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클라운은 특히 후각에 있어서 예민하기로 유명했으니 그의 말은 믿어도 될 터였다. 향수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옷에서 레몬 향이 난다면 그건 왜일까. 오뉴가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본인의 턱을 문질렀다. 무언가에 깊게 몰두할 때면 어김없이 나오는 버릇이었다. 

 

"빨리 머리 좀 굴려 봐. 뭐 생각나는 거 없어?"

"있으면 말을 했겠죠. 기억만 해두고 조사하느라 바빴는데."

"타코야끼 먹느라 바빴던 주제에."

"맛있더라고요."

"너만 입이다 이거냐?"

 

그럼 포장해달라고 말하지 그랬어요. 말을 안 해도 임마 팀원들 먹을 거 알아서 사와야 하는 거 아니냐고. 잭 형도 맨날 맛있는 거 혼자 먹으면서. 내가 언제 그랬어. 아무튼 그랬어요. 뒤질래? 잭과 제미니가 여느 때처럼 사이좋게 대화를 나누는 동안 류가 구석에서 톡톡 홀로그램 창을 두드렸다. 빼곡한 글자들과 각종 사이트들 옆으로 지난 검색어 기록이 나열되어 있었다. [레몬], [레몬향], [레몬타르트 파는 가게 모음], [옷에 묻은 레몬향]··· 중간에 선명하게 다른 길로 샌 흔적이 있는 건 무시해주는 게 서로에게 이로울 것 같다. 오뉴가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린 사이에, 류가 시선이 사이트 하나에 꽂혔다. 

 

"형들. 이것 좀 봐요."

 

치고받고 싸우던 잭과 제미니가 고개를 돌렸다. 허공으로 홀로그램 창이 떠오르자 자동으로 사무실의 불이 꺼졌다. 홀로그램 창이 영화관 스크린처럼 크게 펼쳐졌다. 류가 가볍게 손짓했다. 오뉴에게는 익숙한 학술 정보 사이트의 창이 확대됐다. 몇 번의 타자 소리와 함께 화면에 나타난 건 사이트에 기재된 한 편의 논문이었다. 제목은, [친환경 폐기물의 조성 기간 및 정도에 따른 부패악취저감 연구: 레몬을 중심으로]. 류가 저렇게 어려운 논문을 찾아냈단 말이야, 하는 잭의 중얼거림은 무시한 채 류가 논문을 훑어 내려갔다.

 

“솔직히! 무슨 소린진 잘 모르겠는데요.”

“그럴 줄 알았다.”

“그래도 맨 앞에 요약본을 넣어줬더라고요. 여기 보면··· 해당 연구가 유의미한 결론을 도출했기에, 본 연구는 부검실에서 효과적으로 사용될 수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어려운 말이 왜 이렇게 많아. 아무튼 시체가 부패하는 냄새를 덮기 위해 부검실에서 레몬을 쓴대요. 워낙 부패하는 속도가 빨라서 악취 처리 시스템으로도 제대로 제거가 안 되니까 쓰는 방법이라네요.”

 

뭔가 수상한 냄새가 나지 않느냐며 류가 책상을 내리쳤다. 손바닥이 부딪혀 경쾌한 소리가 났다. 어우 아프겠당. 제미니의 말을 뒤로 하고 오뉴가 다시 한 번 생각에 잠겼다. 부검실과 레몬. 클라운이 맡았다는 레몬향, 옷깃이 스친 자국. 감시용 드론의 좁은 사각지대를 골라 움직일 정도의 용의주도한 대상자. 아니, 아니다. 빠르게 스치던 생각들 중 오뉴가 하나를 가로채 입 밖으로 꺼냈다. 사령관의 감이 번뜩였다. 이 중에 분명 단서가 있었다.

 

“잭, 아까 내가 보내줬던 자료 열어줄래? 파라곤한테서 받았다던 그거.”

 

에, 저요. 난데없이 코드네임이 불린 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잭이 잠시 생각을 되짚더니 빠르게 창들을 띄워 자료들을 나타냈다. 여러 수치들을 나타내는 그래프와 다양한 현장의 사진들이 차례로 공중에 띄워졌다. 오뉴가 그 중 하나를 가리켰다. 언제나 사각지대만 골라 움직이던 대상자가 처음으로 레이더망에 잡혔다. 단순히 실수라고 하기에는 미심쩍다. 두 번의 연쇄 살인 모두 어떠한 흔적을 남기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왜 그랬지. 우연에 우연이 겹친 실수거나, 혹은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거나. 오뉴가 홀린 듯 입을 열었다.

 

“이번에 대상자의 인영이 찍힌 곳은 B-02 구역. 최근에 상권 개발 문제로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심해졌다는 보고서가 들어왔던 곳이야.”

“기억난다. 우리 바빠 죽겠는데 그쪽 아슬아슬하니까 순찰 좀 돌라고 갑자기 끌려갔었잖아요.”

“맞아. 인력을 계속 보충하기에는 무리가 있어서 감시 드론의 수도 늘렸지. 제미나, 대상자가 찍힌 곳 주변의 병원이나 보건소, 의료센터, 아니면 장례식장을 좀 찾아줘. 드론을 피해야 하니 멀리 이동하진 못할 거야. 반경 500미터 정도면 충분해. 그리고 지하에 있거나 지하까지 규모가 확장되어 있는 곳으로 범위를 좁혀줘.”

“네, 잠시만요.”

 

제미니가 빠르게 시스템을 조작했다. 여러 홀로그램 창들을 뒤로 하고 커다란 위성 지도가 중앙에 띄워졌다. 시스템 특유의 AI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명령어 인식 중, 수행합니다, 불필요한 정보들을 제거합니다, 분류 작업 중··· 완료. 결과 창을 실행합니다. 푸른색 홀로그램 창이 공중에서 펼쳐졌다. 지도에서 추려진 곳은 총 세 군데였다. A 국립 장례식장, T 보건소, J 대학 소속 부설 병원. 장소들에 대한 정보를 빠르게 입력해 세 명의 팀원에게 보내둔 사령관이 설명을 이어갔다.

 

“대상자는 평소 차량을 이용해서 움직였을 거야. 용의주도한 성격인 만큼 범행 전에 탈출 루트까지 전부 계산해뒀을 확률이 높아. 이번에는 감시가 삼엄하니 먼 곳으로 이동하는 건 불가능하고, 최대한 사각지대를 이용해서 움직이되 시체가 드나들어도 자연스러워야 하니까.”

“그래서 부검실을 선택했을 거다?”

“그거야. 아마도 신분을 조작해서 숨어들었겠지만 시스템에 걸리는 것도 시간문제겠지. 대상자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거고······.”

 

오뉴가 장소들이 띄워진 창들을 분리해 일렬로 나열했다. 사령관의 손짓에 따라 각각의 홀로그램 창들이 배분되듯 나뉘어 이동했다. 순서대로 A 국립 장례식장은 클라운, T 보건소는 파라곤, J 대학 소속 부설 병원은 데몬. 창 위로 각자의 코드네임이 새겨졌다. 헤드쿼터의 차분한 목소리가 그 위로 가라앉았다. 언제나의 평정심을 되찾은 목소리. 모두가 실감했다. 이제야 모든 게 맞물려 돌아가고 있다.

 

“내 예상대로라면 오늘 밤, 도시가 잠들기 직전에 대상자는 움직일 거야. 일단 눈에 보이기만 하면 잡을 수 있잖아, 그렇지?”

“당연하지.”

“그럼요. 내가 누군데.”

“누가 가장 먼저 잡는지 내기하면 안 됩니까?”

“류야, 내기할 시간 있으면 나가서 나랑 몸이나 풀자.”

 

제미니가 류의 제안을 자연스럽게 넘기고선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곧 움직일 거니까 너무 멀리 가지는 말라는 잭의 목소리를 뒤로 한 오뉴가 본인의 손목시계를 흘긋댔다. 도시 가동 시간을 알리는 특수경찰 보급용 손목시계의 홀로그램이 선명했다.

[도시 가동 02:59:01]

 

3시간 안에 모든 것이 결정된다. 오뉴가 의자에 앉아 눈을 감았다. 이번에도 해낼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클라운, 도착했어?

“롸저. 숨어서 대기 중이에요.”

─확인. 무슨 일 생기면 바로 보고해.

“알겠어요.”

 

무전이 끊겼다. 생각해보면 잠복 임무는 오랜만이었다. 클라운은 대체로 현장에 가장 먼저 달려가서 증거를 수집한 뒤 가장 먼저 현장에서 물러나는 역할이었다. 연차가 쌓이면 어떻게든 사무직으로 가겠다고 염불을 외는 그다운 일이었다. 가끔 파라곤이나 데몬이 사고를 쳤을 때만 달려가서 상황을 수습해주곤 했으니, 이렇게 잠복을 서는 건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었다. 익숙한 긴장감이 손끝을 타고 올랐다. 심장이 찌릿해지는 기분이 유쾌했다. 가끔은 현장에서 뛰는 것도 나쁘지는 않네. 클라운이 휘파람을 불며 가지고 왔던 금속 케이스에 손을 가져다 댔다.

 

[CODE NAME: CLOWN, 시스템 관리자 권한이 확인되었습니다. 시스테믹의 사용을 허가합니다.]

 

AI의 안내음과 함께 케이스가 열렸다. 안에는 손바닥보다 조금 더 큰 정도의 소형 권총과 여러 종류의 기계 폭탄들이 들어 있었다. 클라운이 익숙하게 권총을 손에 쥐고서 수류탄을 집어 들었다. 주인을 인식했는지 수류탄이 가볍게 진동했다. 금속 특유의 한기 어린 촉감이 나쁘지 않았다.

제미니가 클라운이 되기 전, 특수경찰 시험에서 그는 다른 어떤 도구보다도 폭탄형 도구 활용에 타고난 실력을 보였다. 일반적인 국가 경찰들이 총의 형태를 선호한다는 걸 생각하면 이례적인 케이스였다. 제미니의 재능을 높게 산 국가는 그에게 클라운이라는 코드네임과 함께 폭탄 형태의 특수 시스테믹을 지급했다. 지금까지 국가 차원에서 특수 시스테믹을 직접 지급한 경우는 없었다. 이를 생각하면 클라운의 능력치가 어느 수준인지 실감할 수 있으나, 정작 본인은 태연했다. 날 어떻게 생각하든 그게 대수야, 일만 잘하면 됐지. 지금도 클라운은 아무렇지도 않게 수류탄을 허공으로 던졌다 받고 있었다. 데몬이 봤다면 그렇게 비싼 걸 함부로 다루지 좀 말라고 잔소리를 했겠지만 이 자리에 없었으니 알 바는 아니었다. 어차피 이런 것보다 내가 더 중요한데 뭘. 열린 케이스를 구석에 밀어 넣어 정리해두고선 깔끔히 준비를 마쳤다. 어둠에 완벽하게 녹아든 채로 수류탄을 쥐었다. 이제 남은 건 기다리는 일뿐이었다.

 

“음.”

 

그래서 대상자는 대체 언제 온담. 시간이 흐르고 흘렀다. 얼마쯤 지났는지 감도 오지 않을 무렵, 그가 손목을 걷어 올려 시계의 홀로그램을 확인했다. [00:40:35] 도시가 멈추기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도 사람이라고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이쪽은 허탕인가. 조금만 더 기다려보고, 정 안 온다 싶으면 다른 쪽으로 지원을 가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클라운이 혀를 차고선 가볍게 기지개를 켰다. 그래도 가져보는 긴장감이 기분 좋았으니 그걸로.

 

바스락.

 

신경을 곤두세우게 하는 소리. 분명 누군가가 움직이는 소리였다. 이런 시간에 움직인다는 건 자살행위거나 혹은 대상자이거나. 어느 쪽이든 확인해 볼 가치는 충분했다. 클라운이 의식적으로 기척을 죽였다. 숨소리조차 멈춘 채로 어둠 속에서 침묵했다. 완전한 고요가 얼마간 흘렀을 때, 드디어 바스락대는 소리와 함께 구석진 풀숲에서 그림자 진 인영이 나타났다.

 

“······나타났다.”

 

푸른빛에 상대의 얼굴이 얼핏 스쳤다. 클라운이 틈을 놓치지 않고 손목시계로 비춰진 모습을 담았다. 톡톡, 이어셋을 두 번 두드리자 흐릿한 민낯이 헤드쿼터에게로 전송되고 있다는 조그만 안내창이 떠올랐다. 놓치기 전에 확인받아야 한다. 빨리, 빨리. 어쩔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재촉하는 마음이 드는 걸 억지로 눌러 삼켰다. 얼마간의 정적이 흘렀다. 클라운이 초조하게 입술 아래를 훑어내고 있을 때, 귀에 꽂힌 소형 스피커 너머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상자의 CCTV 사진과 97% 일치. 클라운, 제압해.

“확인.”

 

세찬 심장 박동이 목구멍을 타고 전해졌다. 수십 번, 수백 번을 던져봤던 폭탄이다. 실패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클라운이 수류탄의 핀을 이로 뽑아 물었다. 자연스럽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시선으로 대상자와의 거리를 가늠하고선 속으로 초를 셌다. 3. 2. 1. 지금이다. 힘껏 수류탄을 내던지고 어둠에서 빠져나와 뒤로 자리를 피했다. 습관적으로 귓가를 틀어막았다. 직후에 분명 폭발하는 소리가 들릴 것이다.

 

“······.”

 

들려야만 하는데.

툭, 수류탄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였다. 완전한 정적이 이어졌다. 주위는 놀랍게도 고요했다. 클라운이 황급히 수류탄을 던졌던 곳으로 달려 나왔다. 바닥에 떨어진 기계식 수류탄 형태의 시스테믹은 작동하지 않았다. 이는 곧 두 가지 의미 중 하나였다. 첫 번째, 시스템이 상대를 대상자로 인식하지 않았다. 그러나 클라운은 이미 헤드쿼터에게 이 사람이 대상자임을 확인받았다. 3%의 확률에 해당한다 해도 이 시간에 A 국립 장례식장을 이토록 비밀스럽게 빠져나온다면 대상자가 확실했다.

그렇다면 두 번째.

시스템이 상대를 대상자로 인식하지 못했다.

 

“잠깐, 거기 서!”

 

그때 주춤거리던 상대가 빠르게 반대편으로 달아났다. 풀숲을 헤치고 달려나가는 상대를 클라운이 쫓아 달렸다. 황급히 이어셋을 켰다. 얼마나 힘들게 찾은 대상자인데 여기에서 놓칠 수는 없었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그러기 위해선 전달해야 했다. 제미니의 머릿속에 언젠가 그가 읽었던 「셜록 홈즈」의 한 문장이 스쳤다. 불가능을 제외하고 남은 것은 아무리 믿을 수 없어도 진실이다. 그가 다급하게 말했다.

 

“여기는 클라운. 대상자 현재 4시 방향으로 도주 중, 파라곤이 있는 쪽으로 몰아볼게요.”

─뭐? 못 잡았다고?

“네. 아, 미친. 진짜 큰일났어요. 시스테믹이 작동을 안 해요. 제 시스테믹이 오류라기엔 절 인식했어요. 단순히 그런 게 아니라, 정말로.”

 

클라운이 고철덩어리가 되어버렸던 본인의 시스테믹을 떠올렸다. 이전까지 느꼈던 긴장감과는 결이 다른 감정이 전신에 감돌았다. 당황스러움, 혼란스러움, 그리고 그 감정들을 비집고 들어오는 불안감. 그가 세게 주먹을 쥐었다. 전속력으로 달리며 소리치듯 외쳤다.

 

“우리가 가진 걸로는 저 놈 못 잡아!”

 

 

 

 

파라곤이 들고 있던 사격 총을 세게 쥐었다. 반대편 손으로 천천히 총신을 쓸어보자 차가운 감촉이 어김없이 손끝으로 전해져 왔다. 느리게 숨을 고르자 이곳에 도착하기 전에 있었던 일이 다시 한 번 그의 머릿속을 스쳤다.

 

류가 사령관에게 배정받은 장소인 T 보건소로 향하기 전, 잭이 류를 조용히 바깥으로 불러냈었다. 사실 의외였다. 잭은 중요한 임무를 수행할 때는 임무에 집중해야 한다는 이유로 말이 없어지는 타입이었다. 중요하면 중요할수록 아예 주변에 대한 신경을 거두고 오로지 임무에만 몰두했기에, 잭이 누군가를 따로 부른다는 건 상당히 특수한 경우였다. 혹시 이 형 어디 문제 생긴 거 아닌가. 류가 떠오르는 상념들을 제쳐둔 채로 잭에게 다가갔다. 류가 가까이 온 것을 확인한 잭이 주위를 살피다 입을 열었다.

 

“이번 임무, 감이 안 좋아. 뭐라고 설명하긴 좀 그런데···.”

 

잭이 본인의 머리칼을 헝클였다. 본인을 부른 것도 의외지만 잭이 이런 말을 할 줄은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기에 류가 눈만 깜빡였다. 묻어나는 감정은 류에 대한 걱정이라기보다는 상황에 대한 우려에 가까웠다. 그러니까, 잭은 이 임무를 수행하는 중에 어딘가 어긋나버려 완전히 틀어질 것 같은 불안한 예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걸 하필 류에게 털어놓은 거고. 이 형이 대체 뭘 불안해하는 거람. 다른 사람도 아니고 검거율 100%의 특수경찰 팀에게. 류가 떨떠름하게 입을 열었다.

 

“그거 알아? 잭 형은 언제나 감이 안 좋다고 했어.”

“아냐, 이번에는 틀려.”

“비가 오려나.”

“무슨 의미냐.”

“감도 관절처럼 비 오면 삐끗해서 오류가 나나 싶어졌어.”

“이 새끼가.”

 

너 지금 나 늙었다는 거 돌려말하는 거지. 오 알아채네. 이게 진짜 제미니한테 나쁜 것만 배워가지고. 깔깔대며 웃는 류의 앞에서 잭이 씩씩대며 대꾸했다. 넌 안 늙을 줄 알지, 너 늙으면 내가 왜 이렇게 늙었냐고 뒤지게 놀릴 거다. 헐, 그 때는 잭 형 지팡이 들고 다니겠다 내가 옆에서 힘내라고 해줄게. 어쭈. 결국 한 마디도 이기지 못한 잭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 뭐 별 건 아니겠지. 그래야 하는 거고. 류의 앞에서 몇 마디의 말들을 중얼거리던 그가 당부하듯 말했다.

 

“야, 근데 류야. 정말 혹시라도 네 생각대로 일이 흘러가질 않거나, 아니면 네 힘으로는 도저히 풀리지 않는 문제가 생기면.”

“······.”

“그냥 나 믿고 내 쪽으로 보내.”

 

이 형이 갑자기 간지나는 말을 하네. 갈수록 예상치 못한 일들의 향연이라 말문이 막혔다. 생뚱맞다고 하기엔 잭의 표정이 지나치게 진지했다. 마치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날 거라고 확신하는 사람처럼. 평소에 보이던 모습과는 거리가 먼 서늘한 모습이 유독 푸른빛을 받아 가라앉아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류가 농담으로 받아쳤을 것이다. 싫은데 내 맘대로 할 거임. 정도의 대답을 내놓고서 반응을 구경하며 자리를 피하는 게 일상이었는데, 분위기가 분위기인지라 농담일 수 있는 타이밍을 놓쳤다. 결국 류는 알겠다는 식의 싱거운 대답을 내놓고는 오뉴의 목소리에 따라 자리를 떠나야만 했다.

 

“대체 왜 그런 말을 했대. 그 형 진짜 뭐 잘못 먹은 거 아니야?”

 

아니면 진짜 어디 아프다든가. 물론 정말 그런 거라면 데몬이 먼저 말을 꺼냈겠지만, 아무튼 평소에는 하지도 않던 말을 오늘따라 입 밖으로 꺼낸 게 괜히 찜찜했다. 아, 역시 한 번 더 무슨 일이냐고 물어라도 볼 걸. 하필 파라곤은 한 번 신경 쓰이는 건 꼭 확인하고 넘어가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그 집념 어린 성정이 파라곤의 특출난 타격 성적을 만들어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특수경찰이 만들어진 이래로 타격 부문 최초 만점 합격자라는, 전설의 타이틀을 파라곤의 품에 안겨준 성격이 지금은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아니면 역시 다른 형들한테 한 번 말해볼 걸. 파라곤이 머리를 싸매고 있던 그때, 이어셋 너머로 무전이 울렸다. 연결음이 끊기자 다급한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파라곤의 귓전을 울렸다.

 

─현재 T 보건소 방향으로 대상자가 도주 중. 클라운이 보건소의 후문 쪽으로 대상자를 몰아가고 있다고 해. 최대한 빠르게 끝내자, 할 수 있지.

“그게 무슨 소리야?”

─자세히 설명할 시간 없어. 클라운이 대상자를 놓친 척 중간에서 빠질 거야. 대상자는 방심할 거고, 그때를 노려 제압해.

 

멀리서 누군가가 뛰어오는 소리가 헤드쿼터의 무전 소리에 겹쳐졌다. 저쪽이다. 파라곤이 반사적으로 발걸음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향해 내달렸다. 멀쩡히 장례식장 쪽에 숨어 있던 클라운이 왜 대상자를 놓쳤지. 그 형이 실수했을 리가 없는데.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데. 파라곤이 달리는 중에도 이어셋 너머로 헤드쿼터의 무전이 급박하게 귓가로 꽂혔다. 평소 무전을 통해 느껴지던 헤드쿼터 특유의 차분함은 이미 온데간데 없었다.

 

─대상자를 만나는 즉시 시스테믹을 버려야 해.

“뭐라고?”

─그 대상자에게 시스테믹이 안 통해!

 

이게 시발 대체 무슨 소리야. 그러나 파라곤이 상황을 완전히 파악하기도 전에 대상자가 그 너머의 길목을 빠르게 내달리고 있었다. 찾았다. 그가 빠르게 대상자가 달려올 길을 계산하고서 포위하듯이 크게 원을 그리듯 돌아 대상자를 쫓았다. 기어코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었을 때, 파라곤을 스친 대상자의 옷깃에서 익숙한 향이 묻어났다. 레몬 향기. 파라곤이 확신했다. 헤드쿼터나 클라운의 부차적인 설명이 없더라도 알 수 있었다. 지금껏 총 3차례의 범행을 저지른 연쇄 살인범이자 이번 사건의 대상자는 이 사람이었다.

 

“순순히 항복하지 그래. 이미 그쪽에 대한 파악은 전부 끝났어.”

 

사실 좆도 모르지만. 원래 블러핑은 지능이 아닌 자신감 하나로 빌어먹는 기술이다. 파라곤이 씩 웃으며 대상자에게로 다가갔다. 원래대로라면 그의 권총형 시스테믹을 겨누었겠지만, 적어도 헤드쿼터가 말해준 정보에 따르면 그런 것에 이 대상자는 동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승부수다. 파라곤이 손에 쥐고 있던 시스테믹을 내팽겨치듯 바닥에 떨궜다. 바닥에 추락하며 나는 둔탁한 소리가 생경했다. 대상자의 눈동자가 순간 흔들리는 것을 그는 놓치지 않았다.

 

“어차피 곧 있으면 도시가 멈추니까 도망칠 수도 없을 텐데. 서로 편하게 가자고. 달리는 거 힘들잖아.”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어가던 파라곤이 문득 떠올렸다.

그런데 이 대상자, 왜 시스테믹이 통하지 않지?

 

[도시 가동 00:00:10]

[카운트다운을 시작합니다.]

 

AI의 안내음과 동시에 카운트다운이 시작됐다. 도시의 푸른 불빛이 경계의 가장자리부터 하나씩 사그라들었다. 파라곤의 손목에 채워진 손목시계에서 기계적인 안내음이 반복됐다. 사람들을 안으로 들여보내세요, 가동이 종료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가급적 안전한 곳에서 종료될 수 있도록 사람들의 귀가를 유도하고···. 시계의 홀로그램 창이 깜빡였다. 파라곤이 무의식중에 상대의 표정을 확인했다. 도시가 잠든다는 건 특수경찰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반강제적으로 잠에 든다는 것을 의미했다. 순식간에 의식을 잃는다는 건 유쾌한 경험이 아니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도시 가동이 종료되기 전 안전하게 본인의 잠자리를 찾아 누워 있곤 했다. 그러니 가동 종료를 앞두고 특수경찰과 대치해 있는 이 상황이 당황스러울 법도 한데, 상대의 낯은 놀랍도록 평온했다. 아니, 오히려 기다리고 있는 것도 같았다. 무엇을?

 

[5. 4. 3.]

 

파라곤의 머릿속에서 느릿하게 퍼즐이 짜 맞춰졌다. 시스테믹이 대상자를 인식하는 방법, 대상자의 생체칩을 인식하고 거기에 따른 정보를 확인한다. 도시가 잠들 때 모든 사람들이 잠에 들도록 삽입된 생체칩이 인간의 생체리듬을 제어한다. 둘 사이의 교집합은 하나 뿐이었다. 생체칩. 신도시에 사는 모든 인간에게 삽입되어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그것. 만약 생체칩이 대상자에게 존재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었다. 생체칩이 왜 없는지는 지금 중요하지 않았다. 파라곤이 해야 하는 건 본인의 결론에 의심을 가지지 않는 것, 그리고 이 사실을 알리는 것이었다. 그가 빠르게 이어셋을 켰다. 헤드쿼터랑 연결된 것을 확인하자마자 입을 열었다.

 

[2. 1.]

“여기는 파라곤. 헤드쿼터, 이 대상자 생체칩이 없어요. 그러면 모든 게 설명이 돼요. 시스테믹이 안 듣는 것도 잠에 들지 않는 것도, 전부.”

 

도시를 비추던 밝은 빛들이 하나씩 사라져갔다. 빛이 사라진 자리를 그림자가 메웠다. 순식간에 어두워진 세계에서 오로지 중앙 건물의 시계판만이 빛을 발했다. 그림자에 가려져 어둑해진 대상자의 형체가 그의 앞에 나란히 서 있었다. 모든 시곗바늘이 자정을 가리킬 때, 도시가 암전되는 동시에 형체가 훅 움직였다.

 

[도시 가동 종료 11:59:59]

 

평소와 같은 안내창이 그의 시계 위에 떠올랐다. 도시가 잠든 순간부터 특수경찰들은 어둠 속에서도 시야를 확보할 수 있도록 적외선 기능이 달려 있는 전용 고글을 착용한다.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파라곤은 대상자와 대치하는 중이라 고글을 착용할 타이밍을 잡지 못했다. 분명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그는 지금에라도 고글을 찾아 끼는 대신 차라리 본능에 의지하는 쪽을 택했다. 파라곤이 어둠에 익숙해지려 빠르게 주위를 돌아보았다. 보지 못한다면 느끼기라도 해야 한다. 숨을 죽이고 기척을 느끼던 때였다.

 

달칵.

 

무언가 켜지는 소리와 함께 쨍한 빛이 파라곤의 눈을 강타했다. 손전등을 갖고 있었나. 그가 눈을 찡그렸다. 찡그려 시야가 조금 가려지는 찰나의 순간, 상대가 빠르게 거리를 좁혔다. 날카로운 것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이어졌다. 파라곤이 자리에서 멈췄다. 상대가 거칠게 숨을 고르다 파라곤을 지나쳐 그대로 달렸다.

 

“···하.”

 

그의 왼쪽 옆구리의 옷이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아, 미친. 개 아프다. 뒤늦게 찾아온 통증에 황급히 옆구리를 감싸 안았다. 조금은 익숙해진 어둠을 둘러보다 벽으로 천천히 몸을 옮기듯 걸어갔다. 뺨에 익숙한 냉기가 닿자 주르륵, 파라곤이 주저앉았다. 오히려 특수경찰에 들어오기 전에는 많이 다쳐봤던 것 같은데. 시스테믹을 사용할 수 있는 시스템 관리자 권한을 받은 뒤로 크게 다쳐본 적이 없으니 유독 통증이 생경했다. 이어셋 너머에서 들려오는 헤드쿼터의 목소리에 천천히 무전을 연결했다. 숨을 골랐다.

 

“여기는 파라곤. 대상자가 무기를 갖고 있습니다. 아마도 짧은 길이의 칼. 지금은··· 저를 지나쳐서 1시 방향으로 달리는 중인 것 같고, 전 옆구리를 찔렸어요.”

─뭐? 파라곤, 괜찮아?

“괜찮다고··· 말하고 싶긴 한데요. 거짓말이 제대로 안 나오네. 좀 아파요.”

─아니, 아니야. 괜찮아. 여기서 T 보건소까지는 멀지 않아. 금방 갈게, 조금만 기다려.

 

대답할 틈도 없이 무전이 끊겼다. 아마도 당황했겠지. 쉽게 당황하지 않는 형인데 이번 임무에서 유독 당황할 수밖에 없는 일이 많이 생긴다 싶다. 여기까지 달려오는 데에 얼마나 걸릴지를 가늠하던 류가 포기하고 머리를 기댔다. 어련히 알아서 오고 있겠지. 문득 이곳으로 오기 전에 잭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냥 나 믿고 내 쪽으로 보내.”

 

대상자가 본인을 지나쳐서 달렸으니 방향대로라면 데몬이 배정받았던 J 병원이 있었다. 그 대상자가 정확하게 어딜 향할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거나 데몬은 헤드쿼터의 연락을 받고 대상자가 있는 방향으로 위치를 옮길 게 분명했다. 얼떨결에 그 형 말을 들어준 게 됐네. 류가 희미하게 실소했다. 설마 이런 종류의 문제일 거라고는 잭 형도 예상하지 못했겠지만. 제압하지 못했더라도 누군가가 뒤를 지키고 있다는 걸 알고 있으니 크게 불안하진 않았다. 내가 칼까지 맞았는데 이젠 연장자가 뭐라도 보여줘라. 류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헉, 허억.”

 

특수경찰 놈들은 이제 전부 따돌렸나. 아무도 쫓아오지 않는 걸 확인한 대상자가 자리에 멈춰 섰다. 숨을 고르고 흐르는 땀을 훔쳐냈다. 성공적이다. 희열이 온몸에 압도하듯 밀려왔다. 이제 이곳에 숨겨둔 시체만 챙겨 제대로 처리하면 된다. 경찰도 따돌렸는데 처리하는 것쯤이야 간단했다. 그 간단한 일을 완벽하게 끝낸다면. 신도시의 아무도 그의 정체를 모를 것이다. 그가 웃음 지으며 지하의 통로로 걸어 들어갔다.

 

“용케 여기까지 왔네?”

 

그때,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통로 안에 누군가가 있었다. 그가 들고 있던 단검을 세게 쥐었다. 분명 이 통로는 아무도 모르는 곳일 텐데. 숨죽인 채 소리가 들린 방향을 바라보자, 그늘진 그림자 속에서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선명한 백안이 어둠 속에서 유독 눈에 띄었다. 홀로그램 형태의 고글 아래에 새겨진 문양이 빛났다. [DEMON]. 다른 사람에게 넘길 수 없는 본인의 고유한 시스템 장비였다. 그것을 본 그가 확신했다. 이 자는 특수경찰이다. 그리고 특수경찰이 그보다 먼저 이곳에 도착했다는 건 한 가지를 의미했다.

 

“아,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네가 숨겨둔 시체는 이미 찾았어. 용케도 병원 안치실 안에 넣어놨더라.”

“······!”

“감시가 삼엄하긴 했나 봐? 시체는 여기 숨기고, 네 신분은 장례식장 쪽으로 위장하고, 덕분에 우리 애들이 달리느라 고생 좀 했어. 그래도 이왕 들킬 거면 병원보단 풀숲에 묻어놓지 그랬냐. 장의사 분들이 어쩔 줄을 몰라 하시더라.”

 

하긴, 그런 걸 생각할 놈이었으면 애초에 살인 같은 걸 안 했겠지만. 경찰이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동안 그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시체는 들켰다.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안치실에 숨겨두었으니 아마도 본인의 흔적이 남아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지문이나 떨어진 머리카락 같은 것들. 그러나 흔적이 남아 있어 정체를 들킨다고 할지라도, 생체칩이 삽입되어 있지 않은 이상 시스템이 그가 있는 위치를 찾아내기란 어려웠다. 감시 드론의 사각지대는 대부분 꿰고 있다. 대상자의 머리에서 빠르게 판단이 섰다. 이 상황만 무마한다면 어떻게든 살아날 구석은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큰 메리트. 특수경찰이 사용하는 시스테믹은 본인을 해치지 못 한다. 그렇다면 승산이 있다. 그가 이를 꽉 깨문 채 단검을 휘두르며 상대에게로 달려들었다.

쯧. 데몬이 짧게 혀를 찼다. 휘두르는 날붙이를 몇 차례 피하며 제압을 시도했으나 쉽게 통하지는 않았다. 무기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죽이려고 드는 사람과 살리려고 드는 사람의 차이는 명확했다. 특수경찰이 고전하는 모습을 보며 그가 다시 한 번 기묘한 희열을 느꼈다. 영웅이라 떠받들어지던 특수경찰을 바로 자신이 이길 수 있다. 대상자가 세게 칼을 휘둘렀다. 본능적으로 데몬이 몸을 젖혀 피했으나, 툭, 귀에 꽂혀 있던 이어셋이 그어진 채 바닥으로 추락했다. 날카로운 칼끝이 데몬의 뺨을 스쳤다. 붉은 핏방울이 맺혔다. 거의 다 왔다. 분명 특수경찰의 표정은 말이 아닐 거다. 그렇게 생각한 대상자가 입꼬리를 비틀어 웃었다. 칼을 들어올렸다.

 

“야, 고맙다.”

 

그런데 이 자는 왜 웃고 있지?

데몬이 몸을 굽히며 반으로 잘린 이어셋을 밟아 부쉈다. 가죽 재질의 자켓이 흩날렸다. 품 안의 주머니에서 곧장 무언가를 꺼내 쥐었다. 그의 시야에 동그란 원이 차올랐다. 아니, 원이 아니었다. 그것의 정체는 다른 누구보다도 대상자인 그가 더 잘 알고 있었다. 총이다. 회심의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했겠지만 그에게는 시스테믹이 통하지 않았다. 특수경찰 특유의 오만 섞인 웃음이다. 그가 확신하며 몸을 피하는 대신 다시 한 번 칼을 고쳐 쥐고 달려들었다.

 

아니, 달려들려고 했다.

 

탕!

 

발포음이 통로 안에서 메아리쳤다. 탄환이 대상자의 어깨를 관통했다. 이게 대체 뭐지. 그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해 멍하게 서 있자, 통증이 그를 현실로 이끌었다. 어깨 부근이 선명한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찌르는 듯한 고통이 순식간에 그를 잠식했다. 뒤늦게 대상자가 자리에 주저앉아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아프지? 네가 죽인 사람들은 그보다 몇 배는 더 아팠을 거다. 이 개새끼야.”

“어째서, 어째서! 시스테믹은 나한테 통하지 않아! 그런데 왜!”

 

그가 울부짖으며 고개를 들어올렸다. 아까 수류탄을 사용하던 그 특수경찰을 통해 시스테믹이 본인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다시 한 번 확인한 바 있었다. 예상 따위가 아닌 백퍼센트의 확신이었고 진실이었다. 그에게 시스테믹은 통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째서, 대체 왜. 들어올린 시야에 데몬이 차올랐다.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데몬의 손에는 몸보다 조금 더 큰 권총이 자리하고 있었다. 총구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잠깐, 연기라고?

 

“알아. 안 통하는 거.”

 

근데 내가 언제 시스테믹을 썼다고 했나?

데몬이 대상자를 내려다보는 채로 웃었다. 그제야 대상자가 데몬이 아닌 권총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알아챘다. 이 권총, 국가에서 보급하는 총기 형태의 시스테믹이 아니다. 구도시에서나 몇몇 갱단들이 쓴다고 알려졌던 기계식 수동 권총이었다. 데몬이 태연하게 피어오르는 연기를 가다듬고선 안주머니에 권총을 넣었다.

대상자의 표정이 점차 경악으로 차올랐다. 구도시의 무기를 소지하는 건 직위를 불문하고 불법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총기는 암거래 시장에서 구하려 해도 구할 수 없는 극도의 희귀 물품이었다. 그도 처음에는 권총을 구하려다 실패해 단검을 샀고, 그마저도 상상을 초월하는 값을 지불해야만 했다. 그런 무기를 이 자가 대체 어떻게 구한 거지. 그의 생각을 꿰뚫어보기라도 한 듯 데몬이 말했다.

 

“어떻게 구했는지는 비밀이고. 주변에 말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하지? 그런데 어쩌냐, 네가 지은 죄가 워낙 커서 말이다. 시스템이 너한테 얼마나 큰 벌을 내릴지 감도 안 잡히는데.”

 

데몬이 대상자의 손목을 잡아채듯 쥐었다. 손을 튕기자 데몬의 손목에 채워져 있던 손목시계가 자동으로 풀린 채 허공으로 떠올랐다. 철컥, 철컥. 기계가 조작되는 소리가 빠르게 울렸다. 순식간에 수갑의 형태로 변한 그것이 대상자의 손목에 달라붙듯 감겼다. 그가 뒤늦게 손목을 빼고자 거칠게 움직였으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단조로운 AI의 목소리가 수갑을 감싼 홀로그램 막에서부터 흘렀다.

 

[시스템 관리자의 권한으로 해당 인물을 체포합니다. 시스템이 대상의 죄를 계산합니다. 예상 소요 시간 1시간 5분 32초.]

“넌 대체 지은 죄가 얼마나 많길래 1시간이 넘어가냐? 보통은 몇십 분 안으로 끝나는데.”

 

징하다, 징해. 데몬이 혀를 내두르며 대상자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수갑을 풀어보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기분 나쁜 감각이 데몬의 뒷목을 타고 흘렀다. 익숙한 자기혐오다. 대상자를 체포하고 나면 언제나 차올랐고 이번에도 예외는 없었다. 이번에는 반성할 기미도 뉘우치는 기미도, 하다못해 본인의 행동을 후회하는 기미도 보이질 않으니 그 감정이 더 질척하고 찐득했다. 아. 기분 나빠. 데몬이 쥐고 있던 손목을 내팽겨치듯 떨궜다. 서늘한 눈으로 입을 열었다.

 

“야, 그거 네가 뭔 짓을 해도 안 풀려.”

“너······!”

“그러니까 입 다물고 얌전히 뭣같은 교정 프로그램이나 들으러 가. 혹시 모르지, 네가 진심으로 뉘우치는 모습을 보이면 시스템이 참작해줄지. 그래봤자 평생 그 안에서 고통 받는 건 변함이 없겠지만.”

 

순식간에 주위가 조용해졌다. 겁에 질린 건지 아니면 이제야 슬슬 현실 자각이 되는 건지. 어느 쪽이든 데몬이 더 이상 신경 쓸 바는 아니었다. 타이밍 좋게 허공에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헤드쿼터의 전언이었다.

 

[위치 확인. 1분 30초 후에 워프 차량 도착해.]

[수고했어, 데몬.]

 

별 말씀을, 어차피 해야 하는 일인데. 전해지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데몬이 대답하듯 중얼거렸다. 손을 휘적대자 창이 사라졌다. 무전이 통하지 않으니 이렇게 간단하게 보낸 것 같은데. 돌아가면 사령관이 모두를 납득시킬 수 있을 정도의 설명을 요구할 게 분명했다. 귀찮아질 것 같은 예감에 데몬이 눈가를 찡그렸다. 다행히도 대상자 쪽에서 먼저 이어셋을 두 동강 내줬으니 명분은 충분했다. 나머지는, 뭐. 어떻게 잘 설명하면 넘어갈 수 있을 거다. 데몬이 그제야 피곤이 몰려오는 눈가를 눌러냈다. 더 이상 그 무엇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이제는 좀 쉬어야지. 그에게 다가오는 워프 차량을 바라보며 잭이 눈을 감았다.

 

 

 

 

“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래서 쉬었잖아.”

“형은 두 시간 눈 붙였다 뗀 게 쉰 거라고 생각해?”

“그러게. 고양이가 하루에 몇 시간 정도 자야 하는지 찾아볼까.”

 

이 형이 피곤해 죽겠는데 진짜. 잭이 성질을 내려는 기미가 보이자 오뉴가 슬쩍 고개를 돌리며 웃었다. 누가 봐도 상황을 무마하려는 웃음이다. 웃는 낯에 침은 못 뱉는다더니 정말 저렇게 웃고 있는 표정에다 대고 성질을 내기에도 뭐했다. 짜증나 김오뉴. 잭이 화풀이용으로 애꿎은 오뉴의 필기용 종이 모서리를 구겼다.

 

“종이 구기지 말고.”

“형을 구겨버릴 순 없잖아.”

“무서운 말을 하네.”

 

진심인데. 그러나 이번에도 오뉴는 가볍게 웃었다. 잭이 그의 웃음에서 묻어나는 피로를 눈치 챘다. 팀 레볼루션 하트에서 사건이 터졌을 때 가장 구르는 건 클라운이었고, 본격적으로 대상자를 잡을 때 가장 구르는 건 데몬과 파라곤이었으며, 대상자가 잡히고 사건이 마무리되기까지 가장 구르는 건 헤드쿼터였다. 잭이 2시간 정도 눈을 붙였다면 오뉴는 30분도 쉬지 못 했을 것이다. 그 사실을 자각하니 어째 짜증을 내기에도 미안해졌다. 그래, 됐다. 종이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얘한테 화풀이를 해. 잭이 책상 한 구석에 종이를 내려두었다. 오뉴가 옅게 웃으며 파라곤과 클라운의 상태 시스템 창을 훑었다.

 

“류는 크게 다친 건 아니래. 제미니가 제때 달려가서 응급처치를 해준 게 다행이었어. 며칠 푹 쉬면 다시 복귀 가능하다네.”

“다행이다. 좀 쉬라 그래, 이번에 고생 많이 했어.”

“제미니 시스테믹은 혹시 모르니까 오류 수정용으로 관리자 분한테 맡겼고.”

“그렇게 막 굴리다 진짜 고장나봐야 정신을 차리지.”

“대상자는 곧 처분 받을 거야. 처분 결과까지 나오면 공유해줄게.”

“그래. 몇 년 받았는지 어디 한 번 구경이나 해보자.”

 

잭이 허공에 떠 있는 수많은 시스템 창들을 훑었다. 전부 이번 사건에 대한 자료와 팀원들의 개인 수치 및 기록들이었다. 이것도 다 했고, 이것도 체크했고, 이것도. 오뉴가 중얼거리며 시스템 창들을 하나씩 움직였다. 이윽고 창들 위로 커다란 화면이 펼쳐졌다.

 

[임무가 정식으로 완료되었습니다.]

“끝이다.”

 

잭이 소파에 앉아 그대로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자료 정리까지 전부 마쳤다. 이제 정말로 끝이다. 이번에는 빡세게 굴렀으니 짧게라도 휴가를 달라고 요청해볼까. 정말로 휴가를 받아낸다면 다 같이 놀러가는 것도 괜찮겠다. 잭이 기분 좋은 안도감에 젖어들고자 사사로운 생각들을 흘려보내고 있을 때, 오뉴가 시스템 창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입을 달싹였다.

 

“그래서 잭, 권총은 어떻게 구했어?”

“······!”

 

잭이 티 나지 않게 침을 삼켰다. 목소리가 이어졌다.

 

“탄환은 시간이 지나면 체내에서 사라지는 형태인 걸 확인했어. 시스템도 눈치 채진 못했으니 안심해. 다른 흔적도 전부 처리해뒀고. 만에 하나라도 걸릴 일은 없을 거야.”

 

사무실에 잠깐이나마 드리웠던 안도감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잭이 조용히 입 안 살을 깨물었다. 오뉴가 저렇게 말한다는 건 아마도 모든 걸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지금껏 잭이 데몬으로 일하면서 시스테믹이 아닌 구도시의 권총을 사용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동안의 정황이 없으니 걸리지 않을 줄 알았는데. 시스템도 알아채지 못한 것을 사령관이 눈치 챘다. 그가 대답을 망설이는 사이 오뉴가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팀에 해가 될 만한 행동은 하지 않을 거란 걸 알아. 오히려 네가 없었다면 우린 그 대상자를 영영 놓칠 수도 있었겠지. 탓하는 게 아니야.”

“······.”

“너의 팀원이자 동료로서 물을게.”

 

오뉴의 손목에 채워진 시계가 반짝였다. 빠르게 돌아가는 초침 위로 익숙한 홀로그램 창이 떠올랐다. 째깍대는 소리가 온 도시에 울려 퍼졌다. 시작의 징조다. 오뉴와 잭의 시선이 교차했다.

 

“5년 전, 네가 체포됐던 그 날.”

 

[도시 가동 11:59:59]

 

“어떻게 시스템에게서 권총을 숨겼어?”

 

[임무를 수행하세요.] 

 

······NEXT?

즐겁게 썼습니다! 사이버펑크... 경찰... 총... 좋아하는 소재를 마음껏 넣을 수 있어서 재미있었네요. 마지막의 질문 말고도 작중에서 풀지 않은 떡밥들이 많아요. 이후 언젠가 나올 후속편에서 전부 풀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모두 네온사인 가득한 메리 크리스마스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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