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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DE : 레테 - @LETHE__RH

안녕하세요, 이번 사이버펑크 합작에 글로 참여한 레테입니다! 이 코멘트를 누군가가 읽어주신다는 건, 제가 어쨌든 마감에 성공했다는 소리겠죠... 분명 쓰는 건 일찍 시작했는데 어째서 데드라인에 간당간당하게 제출하게 되었을까요... 면목이 없습니다. 장편만 쓰던 버릇이 튀어나오는 탓에 계속 내용을 가지치기 하느라 더 오래 걸린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많이 쳐냈는데도 공백포함 20605자라는 분량이 나와버렸습니다. 이럴 수가... 단편은 익숙하지 않아 허술한 면이 이곳저곳 있겠지만 그러려니 넘어가 주시리라 믿습니다. 결말 부분이 빈약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지만, 어울리게 끝을 내려면 진짜 한 이십만 자는 더 써야 할 것 같아 눈 딱 감고 마무리했습니다. 언젠가는 이 글을 다듬어서 장편으로 다시 써 보고 싶기도 합니다. 공식의 맛을 잊지 못하고 쓴 글이라, 읽다 보면 꽤 익숙한 듯 보이는 장면이 있을 겁니다. 그걸 찾아보는 재미도 있을 거라 믿습니다. 없으면... 어쩔 수 없죠. 제가 정진하겠습니다. 코멘트는 이미 충분히 긴 것 같으니, 이만 줄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합작을 열어주신 피자님께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추위 조심하세요, 여러분!

칙칙한 세상에 색채로 말미암아

오늘도 어김없이 빌어먹을 세상이다.

형광색으로 반짝이는 네온사인을 담은 순백의 시선이 건조히 미끄러졌다. 눈이 아릴 만큼 화려한 네온사인 불빛의 그림자는 오늘을 간신히 버텨내는 유기생명체들의 도피처였다.

그리고 잭 또한 그 유기생명체들에 속했다. 그는 방독마스크를 고쳐 썼다.

더 이상 해가 떠도 밝지 않은 세상은 어둡고 텁텁했다. 인류는 태양빛을 대가로 바쳐 비약적인 기술의 발전을 이뤄냈다. 그런 인류에게 남은 것은 비현실적일 정도의 오버테크놀로지와 바닥까지 추락한 인권이었다. 인간은 로봇과 ai에게 밀려나 값싼 소모품, 혹은 임시 대체품으로 취급받았다.

뭐,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인간은 생존에 필요한 최소조건이 있으며, 체력이 무한하지 않고 신체적인 모든 면에서 로봇보다 못했다. 로봇은 먹고 자고 쉴 필요 없이, 지치지 않고 일할 수 있는데다가 장정 서넛은 필요할 무게를 홀로 거뜬히 감당할 수 있었다. ai도 마찬가지였다. 인간의 두뇌로는 결코 따라잡지 못할 우월한 정보처리, 연산, 기억 능력은 인간의 가치를 한없이 깎아내렸다.

이제는 제법 오래된 과거에, 인공지능과 로봇이 사회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창조적이고 창의적인 것뿐이리라는 말이 있었다.

멍청한 소리다. 전부 틀린 소리였다. 고도로 발달한 ai는 인간의 사고마저 학습해내는 데 성공했다. 설령 그 때문이 아니더라도, 예술이나 창작 같은 것들은 높으신 분들의 전유물이 되었으니… 이 어둡고 습한 땅에서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소리였다.

잭은 손에 들고 있던 스프레이 페인트를 매고 있던 가방에 쑤셔넣었다. 어슴푸레한 어둠이 짙게 깔린 거리, 어둑하게 물든 벽에 칠해진 쨍한 형광 파랑의 페인트가 번뜩였다. 시멘트 벽 위의 낙서, 옛날이었다면 그래피티 아트라 불렸을 그것을 잠시 바라보던 잭은 무심히 걸음을 옮겼다. 타이밍 좋게 이어진 통화가 귀에 꽂은 통신기기에서 흘러나왔다.

[짹형, 어디야?]

“나 지금 길.”

[또 혼자 나갔어? 내가 그러지 말라고 했잖아. 하여튼 내 말은 귓등으로도-]

“어, 그래. 금방 들어갈게.”

땍땍거리기는. 가볍게 혀를 찬 잭은 아직까지도 잔소리가 이어지는 통화를 뚝 끊었다. 지직거리는 전파음과 함께 통신이 종료되자, 목소리에 묻혔던 소음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이곳은 늘 이랬다. 사회의 낙오자들이 모인 도시의 어둠. 소위 뒷골목이라 불리는 이 거리는 언제나 폭력과 욕설, 불법이 난무하는 장소였다. 그러니 지금 이 소란도 일상적인……

-크헉!

평소같은…

-끄아악!

…언제나처럼, 일반적인 것이어야 했다.

평소같은 쌍방 패싸움의 소음이 아니었다. 다수의 사람을 한 명이 제압하는 듯한, 일방적인 싸움의 소란이었다.

이 근처에서 이런 소란을 다시 겪게 될 줄이야. 혹여나 잘못 걸려 귀찮아질까, 잭은 걸음을 멈추고 숨을 죽였다. 또 하필이면 소란의 근원인 골목이 지나가야 하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얼마나 기다렸는지는 모른다. 기다림이 지겨울 정도가 되어서야, 골목 안의 소란이 잦아들었다. 잭은 그제서야 몸을 일으켰다. 느리고 힘없는 걸음이 터벅터벅 골목 안으로 향했다.

“…….”

워, 하는 짧은 감탄이 잇새로 새었다. 어두운 사위 속에서도 똑똑히 보이는 사람들의 실루엣은, 용케 죽지 않았구나 싶을 만큼의 상태였다. 흥미가 약간 뒤섞인 시선이 골목을 훑었다. 골목 반대편 끝자락, 깜박이는 네온사인 밑에 한 인영이 쓰러져 있었다.

일정한 발걸음 소리가 공간을 채웠다. 기척이 다가오는 것을 느꼈는지, 땅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졌던 청년이 고개를 들었다. 형광 네온사인 밑에서도 빛이 죽지 않은 강렬한 적발이 흔들렸다.

열화를 품은 핏빛 적안과 무심하고 메마른 순백의 시선이 맞부딪혔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청년이었다.

“…뭐야, 나한테 볼 일이라도 있어?”

“…….”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짜증이 솟는지, 상체를 벌떡 일으키던 청년이 이내 고통 어린 숨을 뱉었다. 잭은 말없이 시선을 내렸다. 형광 분홍색의 네온사인 아래, 거뭇한 액체로 척척하게 젖은 흰 상의가 보였다.

“…뭘 봐.”

청년의 어조가 날카로워졌다. 금방이라도 주먹을 날릴 것 같은 기세에, 잭이 손을 휘저었다.

“싸우자는 게 아니야. 그냥 다쳤나보다- 한 거지.”

잭은 청년의 경계심을 이해했다. 이 미쳐돌아가는 도시에서는 이런 상황을 극도로 경계해야 함이 옳았다. 갑자기 어떤 불한당이 나타나 가진 거 다 내놓으라며 강도짓을 저지르고 도망칠지 누가 아는가? 청년은 생존의 방법을 잘 아는 것이었다.

똑똑하네. 짧게 평한 잭이 자세를 낮췄다.

“확인 차 물어보는 건데, 저 사람들 다 너 혼자서 쓰러트린 거냐?”

“그건 왜 물어봐?”

“곤란할 텐데, 도와줄지 안 도와줄지 간 좀 보게.”

“필요 없어.”

“진짜?”

“…….”

“진짜 필요 없어?”

아닐 텐데. 잭이 눈을 가늘게 뜨며 청년을 훑었다. 안색은 창백하고, 부상도 심해 보였다. 저 인원을 단신으로 때려눕힐 만큼의 실력자라면, 빚을 좀 지워 둬도 괜찮을 것이다. 컨디션이 말이 아닌 만큼, 그와 그의 파트너 둘이라면 충분히 대응할 수 있다는 계산도 섰고.

그러니까, 결론은…….

“도와줘, 말아.”

“……거창한 도움은 필요 없어.”

일으켜만 줘. 그렇게 내뱉는 어투가 거칠었다. 싸가지 없긴. 잭은 손을 뻗어 청년의 팔을 붙잡았다. 청년은 자신을 붙잡은 잭의 팔을 맞잡고 일어섰다. 순간적으로 실린 체중에 휘청거릴 뻔한 잭이 털어내듯 손을 놓았다.

“가자.”

“어디를?”

“가 보면 알아.”

잭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청년은 궁시렁거리면서도 그의 뒤를 따랐다. 그 짧은 사이에 파악이라도 했나 보지. 그를 따라가면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걸. 잭의 입매가 매끄럽게 말려올라갔다. 똑똑한 놈은 싫지 않았다.

뒷골목을 지나는 걸음이 분주해졌다. 형광 오페라 색의 네온사인이 불길하게 지직거리고, 치안용 카메라의 연둣빛 불빛이 깜박였다. 기계부품의 비릿한 냄새와 알코올의 악취가 진해진다. 깊은 곳으로 들어갈수록 길에 널브러진 사람이 늘어났다. 거나하게 취하거나 멍하니 정신을 놓은 몰골을 한, 신체의 일부가 기계로 대체된 사람들. 뒷골목에서는 흔하게 볼 수 있는 유형이다. 이 미쳐버린 도시에서는 잭이나 청년처럼 사지육신 멀쩡하게 간수하고 살기가 더 어려웠으니.

개미굴 같은 뒷골목을 거침없이 꿰뚫던 걸음이 느려진다. 자연히 잭을 쫓던 청년의 걸음도 느려졌다. 네온사인 불빛 하나 없이, 어느 모로 보나 버려진 폐빌딩의 앞에서 잭의 발길이 멈췄다. 폐빌딩의 문 앞에 선 잭이 귀에 손을 올렸다. 치직거리는 전파의 소음 밑으로 활기찬 목소리가 이어졌다.

[짹형, 뒤엔 누구야?]

“보고 있으면 문 열어.”

[그 뒤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를 알아야 열어 주지~ 그래서 누군데?]

“주워 왔다.”

[……무슨 그런 소리를 길가에서 고장난 안드로이드 주워 왔단 소리처럼 해?]

잭의 미간이 구겨진다. 통신기기에 손을 올린 그가 무어라 말을 얹으려던 찰나, 닫혔던 문이 매끄럽게 열렸다.

“……진작 열어 줄 것이지, 캐묻기는.”

낡은 군화가 건물 안으로 걸음을 디뎠다. 청년 또한 쭈뼛거리며 잭을 따랐다. 어둑한 공간에 팬 돌아가는 소음과 함께 차례로 불이 들어왔다. 습관처럼 주변을 한 번 훑고 바라본 잭의 정면에는…….

“―그래서, 짹 형. 저게 누구인데.”

개구지게 웃고 있는 주황빛 머리칼의 남성이 있었다.

“시발, 깜짝 놀랐네. 너 내가 그렇게 불쑥불쑥 튀어나오지 말랬지.”

흠칫 놀라며 신경질적으로 쏘아붙인 잭이 시선을 돌렸다. 아까의 날카로운 분위기나 싸가지 밥 말아먹은 태도는 어디로 갔는지, 바짝 긴장한 채로 선 청년이 보였다. 밝은 빛 아래에서 다시 본 청년은 생각보다도 훨씬 어려 보였다. 이제 스물쯤 되었을까, 많아 봤자 이십 대 초반을 넘지 못할 앳된 외관이었다.

“나도 얘가 누군지는 몰라. 이제부터 알아봐야지.”

주황 머리칼 남성의 표정에 황당이 깃들었다. 진심이냐 되묻는 눈동자가 잭에게로 향했다. 잭은 어깨를 들썩였다.

“……그렇게 됐는데, 자기소개라도 좀 해 보시지.”

건조한 목소리에 이끌리듯 고개를 돌린 청년을 자신을 바라보는 연둣빛 눈동자와 새하얀 백안을 마주했다. 꺼칠한 입술을 몇 번이고 달싹인 뒤에야, 청년은 언어를 뱉어냈다.

“류. 아카이로 류.”

자신을 류라고 소개한 청년이 습관처럼 주먹을 쥐었다 폈다. 무언가 되물을 새도 없이 다음 질문이 떨어져 내렸다.

“나이는.”

“……스물 한 살.”

질문과 답 사이에 늘어지는 빈틈이 마뜩잖았으나, 꼬투리를 잡기에는 핑계가 빈약했다. 가느다란 시선으로 류를 지켜보던 주황 머리칼의 남성이 발랄한 음성을 내었다.

“그래, 아카이로 류 씨. 나는 제미니라고 하는데, 어쩌다가 이…… 짹 형이랑 만나게 됐어?”

“……뒷골목에서.”

“뒷골목?”

류는 순간, 자신을 관찰하듯 응시하는 제미니의 연둣빛 눈이 마치 치안용 카메라 같다는 생각을 했다. 헐겁게 기워진 대답의 사이를, 보다 못한 잭이 파고들었다.

“뒷골목에서 한바탕 하고 쓰러져 있던 거 내가 데려왔어.”

“아하…….”

“아카이로 류라고 했지.”

“…….”

끄덕여지는 고개를 따라 강렬한 적색의 머리칼이 넘실댔다. 이제 보니 몰골이 생각보다 더 엉망인데. 이것만은 생각이 같았는지, 잭과 제미니의 미간이 나란히 구겨졌다.

“앞은 기니까 류라고 부른다.”

나른하고 퉁명스럽다. 류는 제 앞에 선 백안의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자신을 이곳까지 데려온 남자는 그보다 키가 조금 작았다. 핏빛 적안과 달빛처럼 창백한 눈이 마주했다.

“내가 이름을 알려줬던가?”

“……짹.”

아니야? 그렇게 되묻는 낯이 무구해서, 잭은 솟구치는 혈압을 간신히 다스렸다. 옆에 선 제미니가 배를 붙잡고 웃음을 터뜨렸다.

“하……. 그건 이 놈이 멋대로 부르는 거고. 나는 잭이다.”

“잭.”

“그래.”

잭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는 찰나, 너무 웃어 맺힌 눈물을 닦아낸 제미니가 손뼉을 쳤다.

“자, 그럼 소개는 대충 됐고, 대충 인적사항도 알았고! 그럼 남은 건 하나지.”

내내 유쾌한 미소를 머금던 낯이 거짓말처럼 싸늘해졌다.

“그쪽이 우리에게 얼마나 적대적인지, 얼마나 위협적인지를 알아야겠는데……. 알다시피, 이 동네가 워낙 험해서 말이야. 우리 짹 형이 이상한 걸 주워 오는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긴 하지만. 그게 폭탄이면 내다 버려야 하니까?”

서느런 낯과 언어와는 걸맞지 않게 밝은 목소리가 괴리적이었다. 류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멍청하지 않았다. 불필요한 갈등은 야기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솔직히, 이 사람들에게는 덤비고 싶지도 않았다. 이 험한 뒷골목에서, 이 정도 건물에 이 정도 설비를 갖추고도 문제없이 지내는 사람들이다. 잘은 몰라도 이 수준을 영위할 만한 무언가가 눈앞의 사람들에게 있다는 소리였다.

“적대할 생각도, 위협적으로 굴 생각도 없어.”

역시 똑똑한 놈이다. 잭은 이 어린놈이 마음에 들었다. 그가 한 걸음 나서며 상황을 정리했다.

“자, 들었지, 제미나? 그렇댄다.”

“짹 형이 주워온 게 폭탄은 아닌가 봐. 다행이네.”

“이 자식이…….”

“뭐, 대충 납득했으니 난 이만 가 볼게! 누구 때문에 놀라서, 무기 보다가 나온 거란 말이야.”

투정처럼도 들리는 소리를 하며, 빙글 몸을 돌린 제미니는 금방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보던 류는 제 어깨를 두드리는 손길에 주의를 돌렸다.

“뭐해, 가자.”

이번에도 상세한 설명은 없었으나, 류는 순순히 그 말을 따랐다. 적어도 이렇게까지 한 이상 그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을 것 같았다. 형광등이 죽 늘어선 로비를 지나, 엘리베이터에 탑승할 때까지 둘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잭이었다.

“어쩌다가 뒷골목에서 싸움이 붙은 거야? 꼴 보아하니 원래 이 뒷골목 사람은 아닌 거 같은데.”

“……길을 잃어서 돌아다니다가.”

불친절한 대답이었지만 잭은 구태여 지적하지 않았다. 얼굴 보고 이름 터놓은 지 이제 고작 십 분 남짓 지난 사이인데, 뭘. 애초에 제대로 된 답을 기대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어색하니까 그랬지.

띵, 하는 맑은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잭이 먼저 내리고, 류가 뒤따라 내리자 기다렸다는 듯 부드럽게 문이 닫혔다.

“다른 곳은 정비가 안 되어 있어서, 네가 있을 곳을 치울 동안 잠시 머물 방을 줄 거야. 한 일주일만 거기서 지내.”

텅 빈 복도를 울리는 군홧발 소리가 괜히 음산했다. 메아리처럼 따라 붙는 류의 발소리 때문에 더 그랬다. 어두운 복도에 실낱같은 빛을 드리우는 방이 딱 하나가 보였다. 그 앞에 선 잭이 문을 밀었다.

끼이익…

경첩이 듣기 싫은 비명을 질렀다. 삭막한 주변과 어울리지 않게도 포근한 연노랑빛 백열등이 깜박였다. 단정한 침구와 커다란 상자 하나만이 놓인 방은 딱 보아도 간이용 침실이었다. 류는 방을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미쳐버린 도시에서는 구경조차 힘든 친절을 고스란히 받고 있으니, 불평할 수조차 없었다.

“아까 보니까 옷에 피 좀 묻었던데, 갈아입을 거면 저 상자 열어 봐.”

……아무리 그래도 친절이 과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는 없었지만. 그 의문어린 낯을 기민하게 알아챈 잭이 피식 웃었다.

“왜, 너 잠든 사이에 어디 팔아치울까 겁나?”

“…….”

“너 팔아치울 거였으면 여기까지 데려오지도 않았어. 쉬어라.”

미련 없이 돌아서는 잭의 모습은 아까 본 제미니의 것과 제법 닮아 있었다. 류는 제 눈만을 깜박이다가, 방으로 몸을 밀어넣었다. 드디어 쉴 수 있게 된 몸이 극심한 피로를 호소했다. 다 뜯어고쳐진 몸뚱이라도 휴식은 필요한 모양이지. 메마른 숨을 뱉어낸 그가 방의 불을 껐다.

사위는 순식간에 어둠으로 잠겨 들었다. 창문 너머에서 갖가지 색의 현란한 네온사인 불빛이 춤추었다. 아스라이 들려오는 총성과 싸움의 소란, 취객의 고성이나 기계가 내는 단말마의 소음 같은 것들이 귀를 간지럽혔다. 저 미쳐버린 도시에서 멀어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검고 고요한 공간이 바깥의 소리를 한 겹 잡아먹는 탓에 더더욱 그랬다. 류는 무겁게 내려앉는 수마를 마다하지 않았다.

-시간은 03:27, 새로운 정보를 알려드립니다. 현재 중앙연합청이 피격당하며 개발 부서 하나가…….

가물거리며 멀어지는 의식의 끝자락에서 그런 뉴스가 들렸다.

*

“짹 형.”

“왜.”

“이거 봐.”

잠에 취해가던 백안이 느릿하게 굴렀다. 홀로그램 창에 띄워진 뉴스가 반파된 건물을 비추고 있었다.

-……개발 부서 하나가 완파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부서 내 자료들이 유출되었으리라는 추측도 나오고 있으며, 중앙연합청은 이것을 현재 지도층에 대한 반발로 간주하고…….

“내가 안 했는데.”

나른한 음성이 고저 없이 건조한 기계의 목소리를 짓밟고 흘렀다. 잭은 손을 휘저어 제 눈앞에 들이밀어진 홀로그램 화면을 밀어냈다. 제미니의 또렷하고 형형한 시선이 잭에게 꽂혀들었다. 뒷목을 주무르며 모른 척 고개를 돌리는 그의 앞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어느새 자리를 옮겨 온 제미니가 소파에 파묻힌 그를 내려다보았다.

“형이 아니면, 우리랑 비슷한 또 다른 사람들이 있다는 소리네?”

“너 또 무슨 짓 하려고…….”

“짹 형이 가서 만나 보면 되겠다!”

“야!”

버럭 소리지른 잭이 튕기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가 저질렀는지도 모르는데 만나긴 뭘 만나?”

“그건 지금부터 찾아봐야지.”

“…….”

위이잉, 하는 기계 소리와 함께 띄워진 홀로그램 창들이 방 안을 가득 메웠다. 홀로그램이 발하는 빛 때문에 인상을 찡그린 제미니와 잭이 서로를 흘겼다. 숨 막히는 눈치싸움은 허무하게 끝났다.

“너…….”

“자, 짹 형! 일하자!”

“젠장.”

냅다 도망치려던 잭을 붙잡은 제미니가 활짝 웃었다. 어딜 도망치려고. 졸지에 붙잡혀버린 잭이 할 수 있는 일은 순순히 홀로그램 창을 조작하는 것뿐이었다. 수백 개는 거뜬히 넘어갈 화면들에는 이 도시의 곳곳이 비춰져 보였다. 하여튼 겁대가리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놈이다. 잭이 혀를 찼다. 치안용 카메라를 해킹하다니, 보통 사람으로는 엄두도 못 낼 짓이었다. 까닥 잘못해서 중앙연합에 들키면 그 뒷감당을 어떡하려고.

물론, 뒷감당을 생각하고 저지르는 짓은 아니었다. 치안용 카메라의 인프라는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이용해먹을 가치가 충분했다. 그 증거로, 보라. 징그러울 만큼 혼잡한 화면 속에서 단 하나의 장면을 잡아낸 잭이 제미니를 불렀다.

“야, 제미나.”

“찾았어?”

“찾은 것 같아. 그런데…….”

“왜?”

“이거 중연 소속 유니폼 아니야?”

연둣빛 시선이 잭이 가리키는 홀로그램 창으로 돌아갔다. 완파당했다는 개발부서의 뒷문과 이어지는 골목에 설치된 카메라의 화면이었다. 갈색 머리칼을 가진 남자가 성급한 걸음으로 건물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그가 카메라의 밑을 지나가자마자, 개발부서의 건물이 진동하며 무너져 내렸다. 폭발인 듯 불길이 치솟고, 어둠을 수놓던 건물의 불빛은 어둠에 짓눌려 힘없이 스러졌다.

“맞는데……, 중연 쪽 사람이 그럴 이유가 없을 텐데.”

“……수상하지?”

“수상하네.”

일시정지 된 장면을 이모저모 뜯어보던 제미니가 홀로그램 창을 모두 지워냈다. 수상한 정황이 잡힌 화면만을 손에 쥔 그가 장난스럽게 미소지었다.

“이 사람 추적은 내가 해 볼 테니까, 짹 형은 가서 잠이나 자.”

“어, 그래. 부탁 좀 한다.”

손을 내저어 인사한 잭은 애써 하품을 참으며 걸음을 옮겼다. 다시 소파에 처박힌 그는 배터리 다 된 기계가 기능을 종료하듯 잠에 빠져들었다.

“…….”

순식간에 고르게 변하는 숨소리를 흘려들으며, 제미니는 잠든 잭을 힐끗였다. 그의 동업자는 이상한 곳에서 마음이 여렸다. 아까처럼, 웬 처음 보는 사람도 주워 오질 않나. 아카이로 류라고 했던가. 그 어리고 미숙한 낯짝에만 신경 쓰는 통에 몰랐겠지만, 류의 옷은 일반적인 옷이 아니었다. 뒷골목에 어울리지 않는 하얀 옷인 것은 차치하더라도, 그 옷의 모양새와 목깃의 문양은…….

“쯧…….”

하긴, 모르는 게 당연하다. 잭은 일반인 출신이니까. 어쩌다 옛날 얘기가 나왔을 때 들었다. 그는 기억이 처음 시작되는 순간부터 뒷골목에 있었다고 했다. 그러니 중앙연합 각 부처의 문양이 어떤지 알 리가 있나. 뉴스로 송출되는 중앙연합의 유니폼 정도야 금방 알아보더라도, 홀로그램으로 찍혀 있는 하얀 문양을 기억하기에는 쉽지 않을 것이었다.

삐빅, 삑.

상념에 잠겨 가라앉았던 눈이 퍼뜩 깨어났다. 삑삑거리는 기계의 소음을 제친 그가 allow키를 눌렀다.

-중앙연합 시큐리티 시스템을 해체합니다.

기계음 섞인 여성의 목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온 방 안이 연푸른빛으로 물들었다. 크고 작은 홀로그램 화면에 빼곡한 글자가 주르륵 출력되며 올라갔다. 빠르게 올라가는 로딩바가 깜박였다. 본래라면 기밀 유지를 위해 이중삼중 보안이 걸려 있었어야 할 내부정보들이 무참히 풀어헤쳐진 채로 범람했다.

치안용 카메라에 잡혔던 장면과 대조되어 선별된 사진이 깜박였다. 연둣빛 홍채에 연푸른 화면이 비쳤다.

“이름은…… 오뉴, 고.”

……소속은. 차분히 글을 읽어내리던 움직임이 멈췄다. ‘신기술 개발 부서 생체계열 소속 수석연구원’이라는 짤막한 수식이 뇌리에 박혀들었다. 뉴스, 뒷골목에 어울리지 않은 옷을 입은 청년, 그리고 이 정보까지. 명민한 두뇌가 사건의 실을 순식간에 엮어냈다. 이런, 맙소사…….

“짹 형, 도대체 뭘 주워 온 거야.”

벌써부터 두통이 오는 기분이었다. 주워 온 게 폭탄이 아니라고 생각했더니, 특정 조건을 만족해야만 터치는 초대형 시한폭탄일 줄은 몰랐다. 제미니는 그 초대형 시한폭탄이 쉬고 있을 윗층 어드메를 슬쩍 노려보았다.

“에휴……, 그래. 수습은 항상 내가 하지.”

내 팔자야. 마음에도 없는 앓는 소리를 내며 남은 글을 뇌리에 쑤셔박은 그가 신경질적으로 손을 내저었다. 퓨즈가 나가듯, 깜박이며 사위를 밝히던 홀로그램이 모두 사라졌다. 무거운 적막이 순식간에 내려앉았다. 기계의 쿨러가 작동하는 소리와 두 개의 숨소리만이 어두운 침묵을 갉아먹는다. 기묘한 착잡함에 사로잡힌 제미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파에 파묻혀 잠든 잭에게 담요라 하기에도 뭣한 천을 덮어주고는, 그대로 방문을 열고 나갔다.

경쾌한 걸음이 향한 곳은 치안용 카메라에서 보였던 바로 그 골목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는 낯에 희미한 흥미가 스몄다. 아주 요란하게도 저질렀다. 어찌나 크게 터졌는지, 거칠게 메마른 시멘트 냄새와 폭발의 탄 냄새가 아직도 짙게 꿈틀거렸다. 제미니는 착용한 방독마스크를 매만졌다. 저 멀리 폐허나 다름없게 된 중앙연합 개발부서 건물이 보였다. 손차양을 만들며 그 흉물을 주의깊게 감상하던 그가 웃었다.

“이 정도면 믿을 만하려나~”

주변과 어울리지 않는 상큼한 낯이었다. 이제 돌아갈까, 하며 돌린 발끝에 플라스틱 조각이 채이는 소리가 났다.

“응?”

도르르 구른 시선이 땅을 향했다. 흰색의 아이디 카드가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그것을 주워 든 제미니가 기대어린 탄성을 터뜨렸다. 소속과 이름, 사진이 박힌 아이디 카드가 네온사인의 불빛을 받아 번뜩였다. ‘오뉴’라고 프린팅된 글자가 선명했다.

어쩐지, 너무 급하게 지나가더라니. 물건 간수는 잘 했어야지. 콧노래까지 부르며 주변 폐철더미에 걸터앉은 그가 턱을 괴었다. 놀고 있는 한 손에는 아이디 카드를 야무지게 쥔 채였다.

아이디 카드는 신분증의 역할도 겸한다. 인맥과 금전이 없다면 재발급도 힘든 물건이었다. 그러니 이걸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알면, 찾으러 올 것이다. 그게 오늘이 될지 내일이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제미니는 한 번 기다려보기로 했다. 어차피 남는 것이 시간이었다.

해가 뜨지 않는 하늘은 시간이 얼마나 지나든 어둑하기만 하다. 이러니 이 도시의 사람들이 전부 시간 감각 따위 버려두고 술이나 퍼마시고 약이나 하지. 가끔 희미한 햇빛이 비치는 날이 있긴 했지만, 그런 날은 일년에 한두 번 볼까말까 할 정도로 드물었다. 하여간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는 곳이다. 쓰잘데없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는 불편하지도 않은지 폐철 더미에 몸을 누이며 아이디 카드를 시선께로 들어 올렸다. 갈색 머리카락에 짙은 녹안,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는 미청년의 사진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왜 이렇게 익숙하지. 기억력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 자신했는데, 이 사진에게서 기시감 이상의 무언가를 캐낼 수 없는 것을 보니 아닌 것도 같았다.

도시의 소음을 배경음 삼아 기억 속을 뒤적거리기를 몇 시간, 등이 배기는 감각을 견디다 못한 제미니가 폐철더미에서 뛰어내렸다. 허탕인가. 아쉽다 중얼거리는 그의 뒤통수에 차가운 금속이 닿았다.

“……!”

기다림에 지쳐 반쯤 내리감겼던 눈에 생기가 깃들었다. 방독마스크 아래에 가려진 입매가 씩 말려올라갔다.

“허튼 생각 말고, 손에 쥐고 있는 거 그대로 들어 올려.”

질 좋은 히터의 바람처럼 부드러운 미성은 착 가라앉아 위협적인 냉기만을 풍겼다. 찾았다. 기다림이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음성에, 제미니는 흥겹게 그 지시를 따랐다. 뒤통수에 총구가 들이밀어졌음에도 여유로운 동작이 무장해제의 뜻을 내비쳤다. 귓가 어림의 높이까지 올라간 손에서 아이디 카드가 번뜩였다. 등 뒤의 기척이 움직인다. 제미니는 그것을 읽었다. 뒤에서 뻗어진 손이 아이디 카드를 집어가려는 찰나, 그가 뒤를 돌았다.

“반가워, 오뉴 씨. 우리 초면이지?”

흥미에 절어 번들거리는 연녹색 시선과 놀라움을 채 감추지 못하고 날선 진록색 시선이 마주 얽혔다. 뒤를 돈 탓에 정확이 미간을 겨누게 된 총구를 옆으로 밀어내는 손길이 여상했다.

“첫 인사부터 총을 들이대다니, 보기보다 과격하네~”

“……영양가 없는 소리 할 시간에 내 아이디 카드나 돌려줬으면 하는데.”

“응? 무슨 그런 안 될 말씀을.”

아주 재밌는 농담을 들은 것마냥, 제미니는 웃었다. 약간 헝클어졌지만 부드러워 보이는 갈색 머리칼과 경계심으로 얼룩진 진록색 눈, 앞머리 한쪽에 착용한 은색 핀까지. 의심의 여지 없이 그가 찾던 사람이었다.

“내가 궁금한 게 많거든. 이야기를 좀 하고 싶은데…….”

“…….”

“어째, 썩 내키지 않는 표정이네.”

오뉴는 인상을 구겼다. 말마따나 초면일 것이 분명한 자신에게 보이는 저 관심이 꺼림칙하기만 했다. 거절의 의사를 표하려던 그의 말을, 눈앞의 주황색 머리칼 남성이 가로챘다.

“거절은 곤란해. 그런 의미에서 거부하기 힘든 제안을 할게. 잠시 어울려 주면…….”

중앙연합의 추적으로부터 보호해 주지.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속삭였다.

“!”

진록색 동공이 조여들었다. 지금 이 자가 무슨 말을 하는 거지? 고슴도치의 가시처럼 빼곡이 일어난 날선 기세가 한 사람에게로 쏘아졌다. 그 따가운 경계를 고스란히 받아내는 장본인은 시종일관 장난스러움을 놓지 않았다. 오뉴의 낯에 금이 갔다. 영민한 두뇌는 장난스런 그 한 마디에 축약된 속내용을 출력해냈다.

눈앞의 이 남성은 그를 알고 있다. 그가 무엇을 업으로 삼던 사람인지,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그리하여 지금 그가 얼마나 곤란한 상황인지까지도…….

그러나 무언가가 마음에 걸렸다. 본능에 가까운 감각이 경보를 울렸다. 총구를 거둔 그가 어렵사리 입을 뗐다.

“그런…… 믿음을 보장할 수 없는 제안을, 내가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아, 내가 그 말을 한 했구나?”

거절에 돌려주는 답이라기엔 영 생뚱맞았다. 의미를 되물으려는 찰나, 다시 한 번 말이 가로채였다.

“그쪽이 목숨 걸고 중연 건물을 터뜨린 이유도, 우리가 가지고 있어.”

“……!!”

오뉴의 낯이 창백하게 질림과 동시에 딱딱히 굳었다. 손에서 미끄러질 뻔한 총을 고쳐잡으며 다시 들어올렸다.

“……너,”

아까처럼 인위적으로 가라앉힌 것이 아닌, 낮게 깔린 목소리가 쩍 갈라졌다.

“말해. 그 아이를……, 류를, 어떻게 아는 거야. 어디 있어.”

내내 생글생글 웃는 낯이던 제미니의 눈썹이 까닥였다. 그는 손에 쥔 아이디 카드를 상의 재킷 안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것을 저지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오뉴의 핏기 없는 낯을 구경하듯 들여다보며, 그가 방독 마스크를 벗었다. 선연한 호선을 그린 입술이 달싹였다.

“허술하네. 그래서는 이 뒷골목에서 사흘이면 죽겠는데?”

명명백백 조롱의 의미가 눌러담긴 문장이었다. 오뉴는 그제서야 순간 놓친 이성의 끈을 붙잡을 수 있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 주황색 머리칼의 남성이 지금 그를 떠 본 것임을.

보기 좋게 걸려들어버린 것이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이날 이때까지 살면서, 머릿속이 이렇게 소란스러워질 수 있음을 처음 알았다. 최악을 가정하는 시나리오가 쓰여지고 폐기되기를 끊임없이 반복했다. 이 남자가 중앙연합의 소속이라면? 이미 그 아이를 사살하고 자신을 잡으려 덫을 놓은 것이라면? 아니면, 마굴이나 다름없다는 뒷골목이니까…….

어느 쪽이나 정신이 아득해지는 만약이었다. 재차 숨을 삼킨 그가 총구를 치켜들었다. 제미니의 미간을 곧게 겨눈 총구의 내부에서 탄알 장전되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바른대로 불어……. 그 아이를 어쨌어.”

오. 한가롭게 감탄사를 뱉은 제미니가 눈을 깜박였다.

“듣고 싶어? 그럼 내 제안을 수락하라니까.”

“…….”

외통수다. 거절할 수 없었다. 까득거리며 이 가는 소리가 그의 심정을 대변했다. 결국 총을 내린 오뉴는 한 자 한 자 짓씹듯 언어를 내뱉었다.

“그 제안, 수락할 테니까 나를 그 아이에게 데려가.”

“조건은 그게 전부?”

“허튼수작 부리면 쏠 거야.”

“간결하고 좋네. 연구원으로 보고서 쓰던 실력은 어디 안 가는 모양이지?”

키득…… 장난감을 발견한 어린아이처럼 웃음지은 제미니는 따라오라 고갯짓하며 먼저 걸음을 옮겼다. 가볍고 여유작작한 발소리와 조급함을 애써 눌러 감추는 발소리가 적막한 뒷골목에 메아리쳤다. 앞서 걷는 제미니가 걸음을 늦췄다. 따라 느려지는 또 한 개의 기척이 꽤 우스웠다.

“오뉴 씨.”

곁눈으로 살핀 오뉴는 굳은 표정을 풀지 않은 채 묵묵히 걸음만 옮기고 있었다. 누가 봐도 쓸데없는 대화는 사절하겠다는 분위기였으나, 제미니는 그런 것을 신경 쓸 위인이 아니었다.

“이쪽 길은 치안용 카메라도 없고 엿듣는 사람도 없어. 대답 좀 할래?”

“……또 무슨 용건이야.”

“으음~ 아니다! 나만 들어서는 소용없을 것 같아서.”

황당하다는 시선이 뺨을 찔렀지만, 여상하게 무시했다. 기계와 폐철의 비린 냄새와 알코올의 독한 악취, 불안하게 지직거리는 네온사인, 바닥에 널브러진 폐기된 기계만도 못한 인생들을 지나, 개미굴 같은 길을 찾아가던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서두른 걸음은 속도를 늦추지 않고 폐빌딩의 앞에 닿았다.

“여긴…….”

“우리 거야. 그 총은 버리고, 들어와.”

“총은 왜.”

“이 마당에 이유가 궁금해? 그 총 어디서 났어. 중연에서 들고 나온 거 아냐?”

“도망치다가 얻었어.”

“어디서.”

“나를 추적하는 군인들한테서.”

“아주 왕도적인 무기 수급법이네. 근데, 알아?”

“……?”

“중앙연합 추적부대원들의 무기는 전부 식별 코드가 입력되어 있어서 추적되는 거.”

“몰랐…는데,”

“사실 모르는 게 당연하긴 해! 그거 군 기밀사항이거든.”

“군 기밀사항을……,”

“그야~ 이런 건 기밀로 둬야지. 그래야 그쪽 같이 멋모르는 도망자가 생겼을 때 편하잖아? 그쪽 상황이 상황이니 무기 없으면 불안한 거 이해는 하는데……. 그 추적에 불 들어오는 순간 나도, 내 동업자도, 그쪽도, 그쪽이 아끼는 녀석도 한꺼번에 죽는 거야.”

속 모를 연둣빛 시선이 오뉴의 손에 들린 돌격형 소총을 훑었다. 중앙연합 건물을 터뜨리고, 소속 부서의 중요 자료일 게 뻔한 이를 빼돌리고, 그러고도 지금까지 눈에 띄는 부상 없이 도주 중인 건 확실히 대단했다. 분명 유능한 인재였을 터다. 묘하게 어설픈 건, 지금까지 중앙연합의 그늘 아래 있던 사람이니 어쩔 수 없겠지.

……뭐, 그 어설픈 구석도 한두 달만 이 뒷골목 생활을 해 보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터였다.

오뉴는 총을 버리고 온다며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제미니는 그 뒷모습을 팔짱 낀 채 바라보았다. 길을 다시 찾아올 수 있을까 하는 염려는 추호도 하지 않았다. 중앙연합에 소속된 연구원, 그것도 수석 연구원이라는 명찰은 엘리트 중에서도 손꼽히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었다.

그는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대체 어디까지 가서 총을 버리고 오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 무렵, 길에 물든 어둠을 헤치고 한 남자가 다가왔다.

“총 하나 버리겠다고 어디까지 가나 싶었어.”

“그건 알아서 처리했으니 신경 쓰지 마. 이제 안내해.”

제미니는 제 앞에 멈춰 서는 오뉴에게서 옅은 혈향을 맡았다. 총 버리러 갔다가 한바탕 하고 오느라 오래 걸렸나 본데. 딱 거기서 생각을 멈춘 그는 품에서 작은 리모콘을 꺼내들었다. 폭탄 스위치처럼 생긴 리모콘의 버튼을 누르자, 닫힌 문에서 회로 모양의 빛이 뻗어 나오며 홀로그램 창이 떠올랐다.

“Clown, 출입 허가 요청.”

-요청자 신원 식별 완료. Clown, 복귀를 환영합니다.

무감정한 기계 여성의 음성과 함께 문이 양옆으로 부드럽게 열렸다. 뚜벅뚜벅 걸어들어오는 박자에 맞춰 차례대로 불이 켜지며 실내가 드러났다.

“이쪽으로.”

놀란 듯 주변을 살피던 오뉴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뒷골목의 길에서보다 훨씬 거침없는 걸음이 훌쩍 멀어졌다. 다소 급하게 제미니를 따른 오뉴는 벽이라 생각했던 곳이 열리는 것을 보며 재차 숨을 삼켰다.

그도 뒷골목의 악명은 익히 알고 있었다. 이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 뒷골목이 얼마나 험한 곳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마굴이나 다름없다는 뒷골목에서 이 큰 건물을 차지하고, 이 정도의 설비를 갖추었다면…….

총 앞에서도 여유로울 때부터 짐작은 했지만, 역시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오뉴는 또다시 가슴을 선득하게 들쑤시는 걱정을 부러 미루어 감추며, 열린 벽 안으로 몸을 밀어넣었다.

“짹 형, 나 왔어~”

“어디 갔다 온 거야? 하여간 나갈 때 말은 하고 나가라고 했는데…….”

“너무 잘 자고 있길래 그냥 나갔다 왔지.”

“네가 언제부터 그렇게 날 챙겼다고…… 뒤에는 누구야.”

“아, 형이 찾아 준 사람.”

“내가? ……아, 설마.”

“응, 그 수상한 중연 소속.”

나른하고 무감한 백안이 벽가에 선 오뉴에게로 향했다. 낯선 이에 대한 경계가 날카롭게 다듬어진 시선앞에 선 오뉴는 호흡을 골랐다. 대치 아닌 대치 끝에 그가 미소했다.

“……오뉴입니다.”

상황과는 한참 동떨어진 부드런 미소에, 옆으로 비켜 선 제미니가 휘파람을 불었다. 떠름해진 잭은 대충 고개만 까닥였다. 그 이상으로 대화가 이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그새 의자 하나를 골라잡고 늘어지게 앉아 있던 제미니가 끼어들었다.

“여기까지 왔으니까 자기소개 정도는 해 줄게. 나는 제미니, 이쪽은 잭 형.”

“아까 말한 동업자가 그럼?”

“맞아, 짹 형 얘기야.”

“아니……, 아니. 갑자기 들이닥쳐서 한가롭게 자기소개나 나누고 있어, 무슨. 우리 예상대로라면 이…….”

“오뉴.”

“아, 그래. 오뉴라는 이 사람이 중연 부서 하나를 날려먹은 범인이잖아. 추적도 만만찮을 텐데, 어떻게 데려온 거야?”

“추적은 제 선에서 정리했습니다. 새 추적 부대가 쫓아오기까지 유예가 있었는데, 운 좋게 제미니 씨를 만났죠. 잠시 어울려주면 중앙연합의 추적으로부터 보호해 주겠다고 하더군요. 제게 중요한 사람도 데리고 있다고 하고.”

욕설과 고성이 섞이지 않은 문장을 듣고 나서야, 잭은 눈앞에 선 남자가 중연 쪽 사람임을 제대로 실감했다. 그나저나 추적 부대를 한 차례 정리했다니……. 웬만한 전투력으로는 어림도 없을 텐데. 이 오뉴라는 남자는 키가 크고 체격이 좋은 편이긴 했지만, 싸움과는 영 거리가 멀어 보였다. 무엇보다도 옷차림이 전투에 적합하지 않았다. 약간 흐트러졌지만 여전히 단정한 흰 셔츠와 검은 바지, 흰 가운 차림을 찬찬히 훑은 그가 고개를 슬쩍 틀었다.

“……중요한 사람이라는 건, 무슨 소립니까.”

“짹 형, 아까 형이 주워왔다던 그 어린 애 있잖아.”

“류?”

걔가 여기서 왜 나와. 꿈벅이는 흰 눈에는 의문만이 찰랑였다. 그 반응으로부터, 제가 찾던 아이가 여기에 있음을 확신한 오뉴는 길게 날숨을 뱉어냈다. 안도와 염려가 들끓는 숨을 따라 흩어졌다.

“그 아이는 저희 부서, 제가 담당으로 있는 계열의 실험체였습니다.”

“……뭐?”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그곳에 속해 있던 제가 할 말은 아닙니다만……. 그 아이, 류는……, 실패 사례에 더 가까웠습니다. 주입한 능력은 거부반응 없이 몸에 이식되었지만, 자아의 손상이 없고, 연구원, 상부, 나아가 중앙연합에게까지 적의를 보였던 탓에.”

그가 씁쓸한 웃음을 베어물었다.

“저는 수석 연구원이었습니다. 그 아이를 온순하게 길들여야 할 책임이 있었어요. 윗선은 저에게, 그 아이와 유대관계를 쌓으라 지시했습니다. 하나라도 소중한 것이 중앙 쪽에 있다면, 그 적의도 조금은 사그라들지 않겠냐는…… 그런 속내였겠죠.”

들이마쉬고 내쉬는 호흡이 잘게 떨려 오기 시작했다. 큼직한 제 두 손으로 마른세수를 몇 번 한 오뉴는 느릿느릿 말을 이었다.

“저에게 그 아이의 보호자 역할을 맡긴 건, 중앙연합이 출범한 이래 저질러진 가장 멍청한 실수일 겁니다.”

“실수?”

“네, 실수. 저는 그 아이에게 반항을 가르쳤습니다. 공격성을 배제시키지 않았고, 그 힘을 다루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언제든지, 중앙연합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요.”

“이해할 수가 없네~ 그쪽은 중앙연합에 적을 둔 사람이었잖아.”

“사람 마음이라는 게 다 그렇죠.”

“……그래서, 갑자기 구구절절 사연풀이를 시작한 이유가 뭡니까?”

“중앙연합이 실패한 실험에 관한 자료를 모두 폐기처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엄밀히 따지자면 저희의 실험은 성공에 가까웠으나, 유일하게 살아남았던 실험의 결과…… 그러니까, 류가. 실패 자료로 분류되어서.”

“정 붙인 실험체가 죽는 걸 못 보겠어서 부서 건물을 통째로 날려 버리고 실험체를 탈출시켰다?”

가벼운 목소리가 일축해낸 한 마디에, 오뉴는 무거운 고개를 끄덕였다. 화끈하네, 하며 중얼거리는 소리도 무시하며 손에 찬 시계를 매만졌다.

“별로 궁금하진 않았겠지만, 대략적으로나마 이렇게 말한 이유는… 일차적인 신뢰를 위함입니다. 저는 중앙연합과 척을 진 상태고, 당신들이 류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저 또한 당신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근거를 주고 싶어서요.”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끝맺은 공간을 숨 막히는 침묵이 메꾸었다. 무언가를 고민하듯 눈을 내리깐 잭과, 여전히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상황을 관망하는 제미니, 애꿎은 시계만을 들여다보며 어둑한 낯을 한 오뉴. 셋은 어떠한 간섭도 없이 침묵을 받아들였다. 일 초가 천 년처럼 느껴지는 적막 끝에, 잭이 입을 열었다.

“석연찮은 건 인정하지만, 적어도 거짓말 한 것은 없는 듯하니 넘어가죠. 류는 지금 데려오겠습니다.”

“!”

“여기 가만히 있으십쇼. 허튼짓 했다가는 제미니한테 호되게 당하는 수가 있습니다.”

경고 아닌 경고를 남긴 잭이 바람처럼 방을 빠져나갔다. 오뉴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찬 손끝을 맞잡으며 몸을 수그리는 것을 관찰하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그런 것을 신경쓰기에는 피로가 짙었다.

*

류는 눈을 떴다. 몇 시간이 지났는지는 알 도리가 없지만, 기억이 전혀 없는 것을 보니 어지간히도 푹 잔 모양이다. 침구를 아무렇게나 구겨 밀어놓은 그가 침대에 걸터앉았다. 휴식이 충분했음을 증명하듯, 상처는 흔적도 없이 아문 채였다.

“…….”

어둠에 녹아들어 검붉은 색을 띄는 눈동자가 초점을 흐렸다. 여기서 이럴 때가 아닌데. 마음과 달리 축 처진 몸은 어떤 의욕도 수용하지 못했다. 초점을 흐린 시야에 아롱거리며 번지는 불빛이 화려했다. 창 너머로 도시의 소음이 흘러들었다. 욕설이 섞인 고성, 총성, 폭주하는 바이크를 끌고 달리는 소리, 도시의 중심인 C구역의 높은 건물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 취객의 주먹다짐 소리나, 길가의 네온사인이 지직거리는 소리, 일부러 기척을 내어 걷는 듯 일정한 군홧발 소리마저도…….

군홧발 소리?

“……!”

퍼드득 몸을 일으킨 류가 순식간에 경계태세를 취했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사고가 갖가지 시나리오를 짜냈다 부스러트리기를 반복했다. 만약 추적이라면, 지금 당장 이 문을 열고 나가 제압을…….

“뭐 하냐?”

“……잭?”

“오냐. 헛짓거리 하지 말고 따라와. 널 찾는 사람이 있으니까.”

찾는 사람, 그 짧은 단어에 피어오르는 기세가 제법 위협적이었다. 아, 얘 도망친 실험체랬나. 들은 이야기를 건조하게 되새긴 잭이 말을 고쳤다.

“오뉴라고, 중앙연합 수석연구원이었던 사람이라는데-”

“오뉴 형이라고?”

깜짝이야. 제 말허리를 대차게 끊어먹고 다가온 어린놈의 낯이 생기로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호칭도 그렇고, 반가워하는 것도 그렇고. 생각보다도 훨씬 가까운 사이였나 본데. 하긴, 그 오뉴라는 남자도 전쟁통에 잃어버린 피붙이 찾는 것마냥 간절해 보이기는 했다.

“따라와.”

굳이 설명을 덧붙이는 것도 귀찮아, 그렇게만 툭 던진 잭은 먼저 움직였다. 후다닥 따라오는 류의 기척이 부산스러웠다. 멈춰 있는 엘리베이터에 탑승한 둘은 처음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처럼 입을 다물었다. 류는 제 손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하염없이 내려가는 층수만을 헤아리고 있자니, 1층에 다다르는 것은 금방이었다.

“형 어딨어?”

“성질 급하기는. 따라오랬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오른쪽으로 꺾은 잭은 복도가 어둠에 잠기기 시작하는 지점에서 멈추어 섰다. 누가 봐도 평범한 분전함으로 보이는 장치에 그가 손을 가져다 대자, 장치를 중심으로 빛의 선이 뻗어나오며 홀로그램 창이 떠올랐다.

“하여간 귀찮은 보안 시스템만 덕지덕지 붙여놔가지고는…….”

쯧, 혀를 찬 잭이 헛기침을 했다.

“Demon, 출입 허가 요청.”

-요청자 신원 식별 완료. 환영합니다, Demon.

소리 없이 매끄럽게 밀리는 벽을 신기한 듯 바라보던 류는 열린 틈으로 갈색 머리칼을 보자마자 방 안에 뛰어들었다.

“오뉴 형!”

“……아가?”

앉은 채 허리를 수그리고 두 손을 맞잡고 있던 오뉴가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류의 모습을 가득 담은 진록색 홍채가 얇은 물막에 덮였다.

“다행이다, 아가. 추적부대가 셋이나 따라붙었다 해서 얼마나 걱정했는데…….”

“고작 그 정도로는 어림도 없지.”

“그래, 그렇지…….”

“흠, 크흠.”

익숙하고도 다정하게 류의 머리를 헤집던 오뉴는 헛기침 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입가에 손을 올린 채 그들을 흥미롭게 바라보는 제미니와 잭이 보였다.

“감격스러운 재회의 순간을 방해해서 미안한데, 우리의 진짜 용건은 이제부터거든.”

“…….”

온화하던 진록색 눈이 깜박임 한 번에 사무적으로 변했다. 눈치껏 오뉴의 옆에 의자를 끌어와 앉은 류가 서 있는 잭과 제미니를 쳐다보았다.

“귀찮으니까……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반정부세력이라고 하죠. 저와 제미니는 중앙연합을 무너뜨리고 싶습니다.”

“중앙연합을…….”

“예. 이유를 대자면 사흘 밤낮을 새면서 말해드릴 수도 있는데…… 그건 그쪽들이 이쪽의 제안을 수락해야 어느 정도 오픈할 수 있는지라. 대충, 이 기형적이고 차별적인 사회 구조에 환멸을 느꼈다 정도로만 아십쇼.”

“아직은 좀 부실하지만, 조직의 형태를 갖추고 있기도 하니까~”

“그렇다면, 저와 류가…… 그 반정부 활동에 가담하길 권유하는 게 당신들의 용건이겠군요.”

“빙고!”

따악, 손가락을 튕긴 제미니가 총 모양을 흉내 낸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한 명은 중앙연합에 낙인찍힌 테러범이자 전 내부자, 한 명은 그 관련자. 딱 맞다고 생각했어. 물론 그쪽이 이런 일에 가담할 만큼 중앙연합을 싫어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할래.”

“아가……!”

“형, 생각해. 어차피 나는 언젠가 추적당할 거야. 계속 숨어 다닐 수는 없어. 이 도시 밖으로 나갈 수도 없잖아. 누구보다 잘 알 사람이.”

“…….”

“형도 그래. 형 지금 중범죄자야. 중앙연합 개발부서 건물을 폭삭 내려앉게 만든 장본인이잖아.”

저 말을 늘어놓는 류의 목소리에서 웃음기가 느껴진다면 착각일까. 자신을 설득하기 위해, 열심히 이유가 될 만한 사실들을 쥐어짜내는 모습을 가만 눈에 담았다.

“……임시적인 협력 관계로도 괜찮습니까.”

“상관없어. 어차피 한 번 몸담으면 죽지 않고서야 못 나가니까~”

“그렇겠죠. 멍청한 질문이었군요.”

희미한 미소가 걸린 낯이 잭에게로 돌아갔다. 수락의 뜻은 시선 교환으로 충분했다.

그걸로 끝난 일이었다. 이 부자유스럽고 모순된 도시, 있는 색이라고 해봤자 네온사인의 눈 아픈 빛깔만이 전부인 도시. 칙칙한 어둠에 물든 무채색의 도시 밑에서 만난 선명한 색채는 세상을 뒤덮을 결의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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